박정현 – 오랜만에
간만에 음악을 들었는데
가사가 가슴이 먹먹할 정도였다.
간만에 음악을 들었는데
가사가 가슴이 먹먹할 정도였다.
여러모로 지쳐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적/체력적으로 부친다.
아직 한계점까지 오지는 않았지만
한계점이 예전보다는 가깝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회사앞 서울신문사 광고판에서 보여지는 우체국 보험 TV CF인데
뭐랄까
좀 씁쓸하고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레몬트리에서 프리미엄 김밥으로 기사를 쓴다고 우리 가게도 취재해갔다.
4월호가 곧 나올텐데
가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네이버의 책 소개들을 보면서
얼치기, 양아치들이 전문가 행세들을 하는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http://en.amerikanki.com/advantages-being-married/
다음에 시간 있을 때 좀 읽어봐야지.
이대로 뛰어가면 절벽이 보이는 것을 알면서 뛰어가는 것이 옳은가?
한번쯤 되새겨볼 일
불안과 싸우는 법
책장을 살펴보다가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요즘 나 자신의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가장 큰 문제는 불안이다. 회사에서 도태될 것 같은 불안, 연애와 결혼에서 실패할 것 같은 불안,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안이 늘 내 안에 있다.
자유경쟁시장에서 살아가면서 불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에 따르면 우리가 불안을 느끼는 것은 불행하게도 엄마 뱃속에서 세상에 나온 직후부터다. 우리는 타인과 늘 비교당하고, 비교하며 살아왔다. 주위의 시선과 칭찬에 목마르고, 나 자신이 원하는 나와 타인이 원하는 지위를 얻지 못할까봐 불안해진다.
불안이 엄습할 때, 나를 도왔던 방법들을 상기해본다.
10대였을 때,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나의 유일한 위안은 소설을 읽는 것이었다. 그때는 학교라는 집단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아이들 사이에서 나의 위치를 찾고 안착하는 데 에너지를 소진해버렸다. 모든 아이와 가급적 잘 지내야 하고, 선생님들 앞에서 모범생이라는 가면을 유지해야 했다. 그때 10대 소녀에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데미안>이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무엇보다도 모든 인간에게 선악이 있다는 깨달음은, 가면 뒤의 얼굴에 괴로워하는 소녀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20대에는 무언가 이뤄야 한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하지만 막상 어디에 에너지를 쏟아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사회가 독려하는 대로 스펙쌓기에 힘을 쏟은 적도 있다. 그때는 고민하는 자체가 불안했다. 고민한다는 것은, 일직선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더디게 가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속도전에서 밀릴까봐 불안감에 너덜너덜해진 나는 타인의 기대를 적극적으로 배신하기로 결심했다. 타인이 원하는 바와 내가 원하는 바가 일치하지 않을 때는 타인의 기대를 실망시키고 내 길을 가버리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를테면 ‘휴학하고 가고 싶었던 여행 실컷 가기’처럼 귀여운 수준부터 ‘글 쓰겠다고 잘 다니던 직장 그만두기’, ‘지인들이 반대하는 남자 만나기’ 등이었다. 대부분 주변 사람들이 지지하지 않는 일들이 나로 하여금 불안을 집어던지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했다. 물론 다 결과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배신행위를 통해 타인의 기대에 어긋난다고 해서 별 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내가 갇혀 있던 틀을 깨고 나면, 의외로 내가 원하는 것이 뚜렷하게 보이거나, 적어도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이 걸러지고는 했다.
불안을 잠식시키는 또 다른 방법은 ‘여러 사람들과 모임을 갖는 것’이었다. 20대부터 나는 줄기차게 모임을 만들고, 사람들을 만나왔다. 모임의 조건은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모임일 것’, 그리고 가급적 ‘구성원의 생각과 관심사, 살아온 궤적이 다양할 것’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좋은 점은 내가 확고하다고 믿었던 기준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행복’에 대한 관점도 달라서 누군가는 승진이, 누군가는 여행을 최대한 많이 하는 것이, 누군가는 친환경적인 삶이 행복의 조건이 된다.
경제 사정, 학력, 사회적 위치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다 보면 서로를 평가하는 틀은 획일화되고 편견은 견고해지기 쉽다.
상당수 불안은 기본적으로 타인과 자신의 위치를 비교하는 데서 찾아오는데, 다양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내가 가지고 있던 평가기준이 여러 가지 선택지 중의 하나가 되면서 불안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것, 타인의 기대에 휩쓸리지 않는 것,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편견을 깨뜨리는 것, 불안에 맞서는 나만의 방법들로 긴 터널을 지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 질병처럼 자리잡은 불안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서른의 나는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다.
<김지숙 | 소설가>
한가한 일요일 저녁 8시즈음에
전화를 받았다.
근처 아파트인데 배달이 되냐고
원래는 안된다고 하는데,
마침 한가해서 배달을 하기로 했다.
좀이따 바로 또 전화가 와서
근처 편의점 있으면 콜라 500ml짜리 2개도 사다달라고
그래서 샀다. ^^
순간 “해주세요” 서비스기사가 된 기분
라면도 포장해달라고 해서 불지않게 면도 따로 포장했고,
그리고 내 차를 몰고 그 아파트까지 가서
경비아저씨에게 사정을 해서 출입문을 열어달라고 하고
2만원을 내미는 고객분에게
준비한 잔돈 동전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실수까지 해가며
그렇게 나의 첫번째 배달을 마쳤다.
오면서 헛웃음이 났다. 재미있다고 말하면 좀 이상하고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고 말해주던 그 분들은 몰랐을 거다.
내가 어떻게 배달을 했는지.
뭐랄까
가게를 열면서 나를 내려놓기로 했었다.
그 결심에는 변함이 없고 개인적으로는 저항도 없다.
난 가게에선 초보 식당사장이자 서빙하는 사람인 것이고
거기에 자존심이나 권위의식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다.
길게 보면 결국 노력하는 만큼 인정 받기 때문에 직장생활은 공정하다. 그러나 매달 공부한 만큼 학점 나오는 학교와 달리 성장하는 과정의 Journey는 공평하지 않다. 눈앞의 불공평에 무너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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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이 신입사원에게 해주는 말이라는데,
난 동의하지않는다.
“길게보아도 노력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그것은 공정/불공정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직장생활은 올림픽이 아니다. 공정해야할 필요도 없고 그걸 기대해서도 안된다. 그냥 그런 것이다”
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