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자질
올리브영에서 방송하고 있는 “아트스타코리아”라는 프로그램에서
각 작가의 작품을 두고
심사위원들이 이 작품은 어떤 의도에서 이렇게 구성한 것이냐
라고 물어보았을 때
몇명은
답을 버벅거리며 못하거나
아니면
머뭇거리다가 씩 웃으며 “그냥 제 센스에요” 라고 답을 했다.
집 사람도 마찬가지 생각이었지만
작가가 별 생각없이 작품을 만들고
그에 대해 설명도 못한다면
기본적인 자세가 많이 못미친다고 생각했다.
올리브영에서 방송하고 있는 “아트스타코리아”라는 프로그램에서
각 작가의 작품을 두고
심사위원들이 이 작품은 어떤 의도에서 이렇게 구성한 것이냐
라고 물어보았을 때
몇명은
답을 버벅거리며 못하거나
아니면
머뭇거리다가 씩 웃으며 “그냥 제 센스에요” 라고 답을 했다.
집 사람도 마찬가지 생각이었지만
작가가 별 생각없이 작품을 만들고
그에 대해 설명도 못한다면
기본적인 자세가 많이 못미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일요일 밤이었다.
전화 한통이 왔는데
배달이 가능하냐는 문의였다.
마감이 다가오는 시간 (저녁 8시)
어차피 쉬고 있었기에 그냥 배달해드리기로 했다.
가게에서 꽤 먼 거리의
매봉삼성래미안 아파트였다.
차를 타고 가서 배달했는데,
12,900원어치였고 손님이 배달비로 2,000원을 챙겨줬다.
15,000원을 받아들고 룰루랄라 왔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매출을 올려야했다.
나이 50이 되어서야 깨달은 것들
원본에 가까운 것일텐데
아무튼 상당히 insightful 하다.
“나이 50이 되어서야 깨달은 것들”/이화여자대학교 윤정구 교수님
“나이 50이 되어서야 깨달은 것들”/이화여자대학교 윤정구 교수님
1. 초년 성공은 오히려 인생의 독이 된다는 것.
2. 인생 대박은 쪽박의 지름길이라는 것.
3. 오랜만에 동창회에 나가면 생각했던 것보다 인생역전한 친구들이 많다는 것
4. 영양가만 따져 만든 인맥이 정말 영양가가 별로 없다는 것
5. 명함을 돌리면 97%의 사람은 버린다는 것
6. 일 이년이 아니라 적어도 20년은 해야 전문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7. 40대에 하늘을 찌르던 자만심도 50대로 들어서면 급속도로 꺽인다는 것.
8.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의 기억이나 추억은 고무줄이 된다는 것.
9. 아무리 성과를 많이 냈어도 퇴직하는 순간 회사는 나를 금방 잊어버린다는 것.
10. 인생에서 믿을 것은 자식이 아니라 배우자 밖에 없다는 점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다 극복한 행복한 노후를 만드는 비결은 있는 것을까?
나는 있다고 본다. 내가 창창한 30대의 젊은이로 돌아간다면 다음과 같이 살도록 내 자신에게 충고해 줄 것이다.
1. 기왕이면 친구들보다 늦게 성공하자. 해피엔딩 시점을 기점으로 이전의 모든 불행은 행복을 위한 전주곡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2. 대박을 겸손하게 받아들이자. 운이 없다면 대박은 생길 개연성이 없다. 운을 필연이라고 믿는 순간부터 오히려 쪽박이 필연이 된다.
3. 친구들과 성공을 비교하는 일은 인생의 중반이 넘어간 40이후로 미루자. 그전에는 친구와의 비교보다는 자신의 삶에 더 매진하자.
4. 정말로 뛰어난 사람들은 영양가 있는 인맥을 따지는 사람을 장사꾼으로 취급하여 경계한다. 이들은 단기적 영양가를 넘어 장기적 운명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최고의 인맥으로 생각한다. 결국 장사꾼들은 장사꾼들끼리만 만나게 되어 있다.
5. 잘 포장된 명함보다 자신만의 스토리를 구현해 상대에게 나를 체험하도록 셀링하자. 나에 대한 유니크한 체험을 제공해줄 때만이 상대에게 나를 제대로 각인시키는 제대로 된 명함이 된다.
6.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이라도 더 장기적 안목으로 집중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이 더 전문가가 된다.
7. 인생의 최고의 목표달성을 위한 베이스 캠프를 40대가 아닌 50대로 연장하자.
8. 나이가 들수록 단기기억보다는 장기기억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다. 나이가 들수록 단기적으로 승부하는 일에 일휘일비하지 말고 장기적 관점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들에 매진하자.
9. 조직에 성과로 기여하는 사람을 넘어서서 문화로 족적을 남기는 사람이 되자. 성과는 아무리 많이 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금방 잊혀지지만 문화적 족적은 조직의 기억을 장악한다.
10. 자식들에게 투자하는 반이라도 배우자에게 투자하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배우자를 인생의 진정한 파트너로 받아들이자.
출처 : 이화여자대학교 윤정구 교수님
직장생활과 관련하여 동감하는 내용이 많다.
나는 매일 사표를 쓴다, 빨리 탈출하고 싶어서
ㆍ직장인 3명 가상사표… 상식보다 요령이 통하는 ‘신의 직장’도, 실적으로 인간 통제하는 ‘기업’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매일 널 꿈꾸고 매일 널 외면해.’ 한 시인은 ‘퇴사’를 두고 이렇게 읊었다. 상사에게 사직서를 던지고 떠나는 장면을 안 그려본 직장인이 있을까.
월급과의 애증관계, 상사와는 밀고 당기기. 지친 직장인들에게 사표는 매일 꾸고 깨는 꿈이다.
가상으로라도 사직서를 쓸 수 있다면? 정년 앞둔 부장님부터 사회 초년생 신입사원까지 직장인 3명이 꾹 눌러 담았던 일터 이야기를 털어놓은 가상 사표를 던졌다. 우리에게 회사는 무엇이며, 직장을 떠난 삶은 어떤 모습일까. ‘일신상의 이유’라는 짤막한 핑계 대신 긴 이야기를 담아 대신 가상사표를 썼다.
꿈을 가지고 직장에 들어오지만 막상 직장생활과 현실이 너무 달라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가상의 사직서를 써보면서 자신의 직장생활을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사진은 사직서를 쓰는 모습을 연출해 찍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20대 후반 ‘신의 직장’ 2년차 신입사원 ㄱ씨
▲ 회사가 가르치는 ‘사회생활’이란 일 키우지 않기, 모르는 척 책임지지 않기였다. 꿈? 자아실현? 이제 그런 게 다 뭔가 싶다.
지인들은 우리 회사를 신의 직장이라고 불렀어요. 부장부터 사원까지 밥먹듯이 지각하고 사무실에 붙어 있질 않아도 나무라지 않는 회사. 철밥통에 업무 성과와 상관없이 일을 안 해도 승진할 기회가 널렸거든요. 그저 내가 융통성 없는 거겠지, 2년간 자책하며 버텼습니다. 떠나는 마당에 남 탓 좀 실컷 하고 가렵니다.
‘초심’. 제가 제일 싫어하게 된 말입니다. 회사와 사회가 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데, 왜 나한테만 그놈의 초심 타령을 해대는지. 2년 전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망하던 일을 하게 됐고 저도 회사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습니다.
입사하고 3개월간 일주일에 ‘8일’은 술을 먹고 4일은 토하며 무슨 정신으로 회사를 다녔는지 모르겠어요. “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 “이것도 능력인데”라고 선배들이 그랬죠. 선배 실망시키기 싫어서 억지로 술 마시고 토하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던 게 몇 날인지.
술 먹는 건 정말 능력이 맞더라고요. 부장에 관해 들리는 이야기는 업무 성과나 리더십 대신 폭탄주 제조 능력에 관한 것뿐이었어요. 지금 부서 관련 경력이 전무한 부장이 술 잘 먹고 아부 잘해서 승진한 회사니까요. 술 냄새 풍기며 아침 10시에 출근해 3시간 동안 점심 먹고 오후 4~5시면 정체 모를 외근 나가는 게 부장의 일과였습니다.
퇴근하는 부장의 발걸음은 항상 가볍고 당당해 보였습니다. 사무실에서 부장 보기가 어려워 저는 닷새 동안 서류 하나 결재를 받지 못한 적도 있어요. 부장의 간부회의용 보고서도, 인원과 금액을 부풀린 부장의 가짜 업무추진비 사용내역도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줄 잘 선 부장을 지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부장 따라 부서 선배들도 곧 변하더군요. 사무실 자리조차 지키지 않는 선배들의 공백을 제가 메우는 게 어느 순간 너무도 당연해졌죠. 정시에 출근해 점심시간 지키고, 곧잘 야근하는 제게 돌아오는 핀잔이 잦아졌습니다.
“너 왜 혼자 9시부터 나와 있나.” “부장님 산책하시는데 같이 가드리지 그랬냐”. 자기 일을 내게 미룬 선배들은 고마워하기보다 불편해했어요. 저는 어느새 별난 원칙주의자에, 융통성 없이 남의 일을 떠맡아 하는 막내가 돼 있었습니다.
어찌됐건 회사에서 인정은 받았습니다. 하지만 부서 밖으로 눈을 돌려도 비전을 보여주는 사람이 없어 답답했어요. 어떻게 하루, 일주일을 무탈하게 지낼까 자기 보신에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간부라고 앉아서 한 치 앞만 보고 있습니다.
회사가 가르치는 ‘사회생활’이란 이랬어요. 적극적으로 나서 일 키우지 않기, 방향이 틀어지면 모르는 척 책임지지 않기. 잘못을 사과하는 건 부서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고, 고맙다고 하면 ‘을’을 자처하는 나약한 인간이라고 하더군요. 부서 간 기싸움에 결재가 미뤄져 협력업체는 피가 말라도 그런 사정에는 눈감아야 자존심이 세워지는 거더라고요. 투철한 책임감은 남을 불편하게 하는 거였고, 정직함은 융통성 없음과 동의어였습니다. 그런 줄 진작 알았으면 돈 많은 남자 물어서 결혼할 생각이나 했지, 피 터지게 공부는 왜 하고 꿈은 왜 꿨을까요?
송곳이라는 웹툰에서 이런 대사를 봤습니다.‘강제된 선택지에 시시한 통찰을 덧칠해서 마치 새로운 답인양 떠들어대는 어른인 척하는 어른들의 하나마나한 조언들.’ 더 이상 시시한 조언들에 기대 버티고 싶지 않아 신의 직장을 떠납니다. 도망치는 거예요. 꿈? 자아실현? 이제 그런 게 다 뭔가 싶어요. 그저 내가 뛴 만큼 벌어서 쓸 수 있는 나만의 일이라면, 상식이 통하는 사람들과 일할 수 있다면 뭐라도 좋아요.
■ 40대 초반 대기업 협력업체 팀장 ㄴ씨
▲ 실적이 업무 평가에 포함되는 순간부터 동료들은 등돌리고 싸우고 줄줄이 그만뒀다. 괴로워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닌 지 오래다.
제게 회사 동료들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친구들이었습니다. 제가 시골 살다가 사춘기 때 도시로 이사왔거든요. 애들이 촌놈이라고 놀리는 게 싫어서 싸움질하고 다녔어요. 사고를 크게 쳐서 고등학교 졸업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다 스무 살 넘고 마음 잡고 들어간 첫 직장에서 18년째 일해왔습니다. 여행도 다니고, 일 끝나면 술 한잔하고, 휴일에 축구하고…. 다 회사 동료들하고 했어요. 고객들이 겪는 제품 고장을 해결해주고 ‘잘한다’, ‘기술 좋다’ 얘기 들으면 흐뭇했습니다.
이 모든 게 황폐화되는 건 한순간이더군요. 우리는 기술 문제를 해결하는 기사들인데, 5년 전부터 영업 실적이 업무 평가에 포함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승진해서 팀장이 됐습니다. 상품을 못 파는 직원들 퇴근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제가 이행했어요. 9시 넘어서까지 동료들을 사무실에 붙잡아 놓고 반성문, 영업계획서 쓰게 하는 거예요. 직원들 본인 명의로 상품에 가입하게 강제 할당도 했습니다. 몰래 빨리 퇴근시키기도 하고, 평가를 낮게 받은 직원은 전산 조작해주기도 했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었어요.
누군가 ‘배째라’고 퇴근하면, 위에선 ‘내일부터 나오지 마’ 소리가 나옵니다. 동료가 잘려도 눈치 보느라 항의를 못했습니다. 대화는 줄고 싸움이 늘었습니다. 10년 넘게 지낸 동료들이 줄줄이 회사를 그만두고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닌 지 오랩니다. 동료들의 삶을 제가 통제하고 있다는 게, 사람으로서 못할 짓이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습게 팀장 감투 썼다고, 밖에서 사람들 만나면 으스대는 나쁜 버릇도 들었습니다.
우리 회사는 대기업 자회사의 사업부 협력업체입니다. 1990년대 후반 처음 입사할 때 저는 자회사 정직원이었습니다. 사장은 항상 본사나 자회사에서 내려옵니다. 사장이 바뀔 때마다 제가 계약하는 법인도 계속 바뀐 건 은행에서 알았습니다. 대출 끼고 작은 집이라도 사러 갔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습니다. 한 직장에서 쭉 일해온 저한테 “회사를 너무 자주 옮겨서 신용도가 낮다”고 하더군요. 지금 제 법적인 근속 기간은 4개월입니다. 회사에서 보낸 18년의 무게도 그만큼 줄어든 것 같습니다.
이제 회사 안에서 더 목표가 없습니다. 전에는 승진하고, 월급 오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5년 전 본사 통제가 심해지면서 저는 팀장 되고도 임금이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5년 전과 똑같이 연봉 3000만원이 안돼요. 임금은 본사가 임명한 사장이 얼마를 챙겨가기로 마음먹느냐에 달렸습니다. 임금이 줄고 붓던 적금 금액을 맞출 수가 없어서 저축도 그만뒀어요. 어, 어, 어 하는 사이 내 삶이 없어져버린 느낌입니다.
여행 가고 차도 사고 연애하면서 평범하게 사는 일상을 잃었습니다. 팀장이라고 남들보다 1시간 일찍 나오고 가장 늦게 퇴근하고, 한 달에 한 번 쉬었습니다. 여자 만날 시간이 어디 있나요? 때 되면 장가가고 애 낳고 살 줄 알았는데 이젠 포기했습니다.
요새 고향에서 농사짓고 마음 편히 사는 친구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직하면 고향 산속에 들어가 집 짓고 살 생각입니다. 이제 탈출하고 싶습니다. 산에서 약초랑 나물 뜯어다 팔까 합니다. 요새도 가끔 산나물 캔 걸 무쳐서 직원들 주면 다들 맛있다고 하는데 그게 참 좋더라고요. 근근이 살더라도 지금보다 행복할 것 같습니다.
■ 50대 초반 한 금융기업 부장 ㄷ씨
▲ 승진하고 연봉 오를수록 “실적 좋을 겁니다”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저녁이 없는 삶은 괴로웠고 가족도 힘겨워했다.
승진하고 연봉이 오르고 한가해질수록 회사 생활이 괴로웠습니다. 제 일이라는 게 종일 앉아서 오늘 얼마를 벌 수 있는지, 벌었는지 따지고 지켜보는 겁니다. 모든 게 돈과 숫자입니다. “이번달에는 실적이 더 좋을 겁니다.” “목표치를 달성할 수 있을 겁니다.” 입에 거짓말을 달고 살았습니다. 회사에서 멍하니 앉아 있을 때도 많지만,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책임질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욕을 먹고 사과하는 요식행위를 하라고 억대 연봉을 주나보다 싶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잇기 위해 내 시간을 파는 기분이었습니다.
동기들 사이에서도 몇 년 전부터 승진을 두고 경쟁해 마음 편히 못 만납니다. 끝없이 날아오는 낙하산 앞에서는 다 천민일 뿐인데요. 젊을 땐 주요 기업 간부나 고위 공직자 같은 이들은 적어도 적정 수준의 교양과 능력이 있어서 그 자리에 갔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지금은 어디 회장이다, 중책을 맡은 사람이다 하면 룸살롱에서 많이 기었겠구나, 제대로 훈련받은 사람은 결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렇게 성공한 뒤에 소고기 먹는 거 말고 뭐가 더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은 소고기 먹으려고 기써서 공부하고 경쟁해 온 건가 싶습니다.
아침마다 양복 입고 여의도로 출근하는 삶이 자랑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이곳에는 내로라하는 회사들이 몰려 있고 여러모로 수준 높은 동네라고 생각합니다. 그 좋은 회사들 앞에서 노조 조끼 입고 시위하는 이들의 모습을 매일 봅니다. 우리 회사에도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이 있지만 우리가 적인지 동료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처음 입사했던 1990년대에는 식당 노동자들까지 모두 한식구라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웬만큼 못나도 함께 가자는 생각, 신입사원 시절에는 그런 온정주의가 조직을 병들게 한다고 여겼는데 성과주의가 전부인 지금은 그때가 그립습니다.
저도 한때 일에 열정을 다 바쳤습니다. 입사하고 수년간은 자진해서 새벽까지 회사에 남았습니다. 대학에서 배운 걸 실제 업무에 여러 가지로 적용해보는 게 즐거웠습니다. 매달 돈까지 주니 환상적이었죠. 거기다 회사에서 맛있는 밥 사주고 술 사주니 나도 성공한 인생이구나 싶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일한 사람과 그 성과를 가져가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 일의 내용보다 어떻게 포장해서 위에 보고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는 건 나중에 배웠습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재미있는 일과 멀어졌습니다.
10년 전쯤엔 일부러 새 프로젝트에 자원해 1년간 신나게 일했습니다. 매일 야근하고 집에 가자마자 쓰러져 자는 게 일상이던 어느 날, 새벽 2시쯤 잠이 깼는데 아내가 혼자 식탁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더군요. ‘힘들다’고 했습니다. 아이들, 집사람과 함께인 삶이니까 이대로는 안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이후 다시 관리자의 삶을 택했고, 술자리에 다니며 줄 서고 사내 정치에 시간 쓰기를 포기한 대신 가족과 저녁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손해 보거나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회사를 나와서는 뭘 하든 두 아이, 아내와 함께 해나가려고 합니다. 퇴직하고 나면 우리 가족 브랜드를 만들어 경영해보자는 이야기를 종종 나눕니다. 애들은 요리에 관심 있고, 만화와 소설이 좋다니 출판업도 좋습니다. 제 아이들은 저처럼 좋아하는 일이 아닌 데 시간 쓰면서 살지 않길 바랍니다. 저는 교육과 관련한 공부를 해보고 싶습니다. 대도시가 아닌 곳으로 삶터를 옮기는 것도 고민 중입니다.
저보다 젊은 한 거래처 간부가 얼마 전 갑자기 쓰러져서 수술을 받게 됐습니다. 저도 쉰이 넘었습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왜 이런 일에 시간을 쓰고 있나 싶습니다. 20년 넘게 다닌 회사를 그만두면 아쉽고 그리워질 것들에 대해 자문해봤습니다. 즉각 아무것도 없다, 빨리 나오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회사에 아무런 원망도, 남기고 싶은 말도 없습니다.
<김여란 기자 peel@kyunghyang.com>
동감하는 부분이 많다.
‘안철수 현상’ 비껴가는 안철수
기사입력 2014-04-11 21:06
미숙한 판단 소심한 결단으로 ‘잠시 사는 길’ 찾아가
그 동안 변한 만큼 다시 변해야 ‘안철수 현상’ 지킬 것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공동대표, 그냥 안철수라고 쓰자. ‘안철수 현상’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모두들 그렇게 부른다. 마치 인기인이나 스포츠스타를 대할 때처럼. “안철수가 달라졌다. 웃음이 없어졌고, 밝고 화사하던 모습이 사라졌다. 위로 멀리 바라보던 시선을 볼 수 없다. 어눌하지만 단어와 술어 하나하나에서 공감이 있었는데 아니다. 이제 여의도 정치인이 다 됐다.” 어느 보통 아주머니의 말이었다. 40대 혹은 50대, 평범한 정치적 관심을 갖고 있는,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로부터 많이 듣게 되는 말이다.
안철수가 ‘안철수 현상’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2012년 서울시장 선거, 2013년 대통령선거에서의 일을 다시 언급할 계제는 아니다. 그 두 번의 선거는 안철수가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에 앉으면서 이미 하나의 켜로 묶여버렸다. 공동대표 이후 안철수가 기초공천 문제를 여론조사와 당원투표에 맡기겠다고 했을 때, 결론이 나온 후 기자회견을 했을 때가 관심이다. 정무적 판단에 미숙했고, 정치적 결단에 소심했다. 스스로 ‘안철수 현상’을 비껴간다면 그가 우리 정치에서 갖는 의미는 희석될 수밖에 없다.
안철수는 공동대표를 맡으면서 비장한 결의를 밝혔다. “잠시 죽더라도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새정치의 길이자 수권정당으로 가는 길이다.” 감수하겠다는 ‘잠시의 죽음’은 기초선거 무공천을 고수하여 눈앞의 6ㆍ4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는 것을 의미했다. ‘새정치의 길’은 실언을 일삼는 기존 정치행태를 벗겠다는 선언이었다. ‘수권정당으로 가는 길’은 이번 패배를 밑거름으로 2017년 정권교체를 이루겠다는 다짐이었다. 정확히 2주일 만에 전제로 내세웠던 ‘잠시의 죽음’을 포기했으니 그 결과로 상정한 ‘새정치ㆍ수권정당의 길’이 허망하게 다가온다.
여론조사와 당원투표를 통해 자신의 결단을 바꾸려 했다면 진정 ‘비장한 결단’을 내렸어야 한다. 여론조사와 당원투표에 기대어 ‘죽음에 이르는 길’에 이끌려 가지 말고 ‘잠시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선택했어야 한다. 혹시 여론조사와 당원투표의 결과가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나올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면 다른 얘기지만, 그건 아닌 듯하다.
스스로 ‘안철수 현상’에 부응하기를 포기한 대목은 이후의 기자회견에서 읽을 수 있다. 당일 오전 약속했던 기자회견이 연기됐다. 내용에 대한 의견조율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은 했지만 취소인지 연기인지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오후 늦게 이뤄진 입장발표에선 ‘새정치’란 말이 완전히 사라졌다. ‘정치개혁’이란 말로 에둘러 갔다. ‘안철수=새정치’라는 현상을 스스로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입장의 요지는 “기초선거 정당공천은 폐해가 많다. 새누리당이 약속을 깨고 공천을 한다. 선거에서 우리만 괴멸을 당할 것이다.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지만, 정부여당의 독주를 견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는 이어 “남들이 가지 않아 험하고 힘든 길을 가야 한다. 혁신의 선봉장이 되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앞뒤가 맞지 않다. 앞뒤가 맞으려면 “상황이 이러하니 나 안철수는 새정치를 위해 백의종군하며 ‘잠시의 죽음’을 택하겠다”고 했어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기자회견이 이뤄지고 새정치라는 말을 쓰지 못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최근 수년 동안 우리 정치가 활기를 띠게 된 동인은 ‘안철수 현상’이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를 희구하는 분명한 실체이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안철수가 달라졌다고, 그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졌다고 ‘안철수 현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은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으며, 이미 안철수 개인의 상징을 넘어섰다. 이번 일을 계기로 6ㆍ4 지방선거에서 거대한 여권을 견제하게 된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안철수 현상’을 잠복시키는 쪽으로 작용한다면 손실이다. 안철수가 다시 달라지거나, 새로운 안철수가 나타나거나 ‘안철수 현상’의 실체는 잘 가꾸어져야 한다.
정병진 주필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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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일을 하면서 사진을 찍은 기억이 별로 없다.
많은 기억들, 추억들은
사진이 아닌 점점 희미해져갈 기억속에서만 자리잡고 있다.
더 늦기전에 기억을 남기고 싶다.
이게 새정치야?
한심하다 못해 불쌍하기 까지 하다.
새정치민주연합, 당론 뒤집고 ‘공천’키로 결정
새정치민주연합은 10일 애초 당론을 뒤집고 6·4지방선거에서 기초단체장 및 기초의원 후보를 공천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새정치연합은 전날 전당원 투표와 국민 여론조사를 실시, 당원과 국민에게 기초선거 정당공천 여부를 다시 물어 공천 53.44%, 무공천 46.56%의 결론이 났다고 이날 오전 공식 발표했다.
안철수 새정치연합 대표는 “대표는 위임된 자리에 불과하다. 이것이 국민과 당원의 뜻이라면 따르겠다”고 말했다.
<심혜리 기자 grace@kyunghyang.com>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어서
의욕이 많이 떨어진 상태이다.
일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하루하루다.
나는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알고 있다.
이래저래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의 흐름이 잘 느껴지지않을 정도다
출근길 아파트 단지의 나무에 새싹이 피어나는구나 싶었는데
어느새 벚꽃이 피고 또 지고 있다.
일요일 가게 밖 구름 한 점 없는 풍경을 보다가
시간이 말도 안되는 속도로 지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