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서기
나는 항상 줄을 잘 못서는 것 같다.
이것도 나의 운명이려나.
서글플 때가 있다.
나는 항상 줄을 잘 못서는 것 같다.
이것도 나의 운명이려나.
서글플 때가 있다.
몰려서 다가오는 안좋은 일들을 보면서
당황스럽기도 하다가
잠시 정신을 차려서 하나하나 정리해서 대응해야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
안좋은 일이 몰려왔으니
좋은 일도 언젠가는 몰려오겠지
그렇게 생각해야겠다.
오늘의 크롬 시작화면
Hoher Kasten, Appenzell Alps, Switzerland
라고 하는데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어떤 집수리(?)
아 참 좋다.
집관리나 집도둑문제만 빼면 이런 단독주택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http://www.archdaily.com/418112/jaehoon-s-jip-soori-moohoi-architecture-studio/
난생 처음 초원을 밟아본 젖소들
그들의 껑충거리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묘했다.
나도 그렇게 될까.
**
생애 처음 초원을 본 젖소들의 ‘반응’
ⓒyoutube
평생 축사에 갇혀 세상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던 젖소들이 생애 처음으로 푸른 초원을 본 뒤에 보인 뜻밖의 반응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동을 주고 있다.
독일의 쾰른에 있는 한 축사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화제를 모으고 있는 젖소들은 총 25마리로 평생 축사에 갇혀 우유를 생산했다.
하지만 농장주는 이들 젖소가 더 이상 젖을 짜내지 못하자 도축을 해야할 상황에 처했다. 소들이 하루에 먹는 사료 등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이런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자, 한 동물보호 단체에서 기금을 모아 25마리 젖소들에게 자유를 선물하기로 했다.
새로운 삶을 얻은 첫날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젖소들이 처음 풀밭을 보자 흥분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초원 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니기 시작했던 것.
이 영상을 보면 젖소들이 마치 강아지들처럼 신이나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있다. 소들은 풀밭에 머리를 부비고, 처음 만난 세상을 찬미하듯 신선한 풀향기에 취해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
동물보호 단체는 이들 젖소가 죽을 때까지 안락하게 초원 위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이들에게 후원이 이어지면서 동참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국민이 미개한가?
정몽중 당시 서울시장 후보의 막내아들은 미성년자라니 그렇다 치고
일개 교수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발상이다.
서민 교수 “이제, 유권자를 욕할 때다”
7월 30일 있었던 재보선 결과 새누리당이 무려 11석을 석권했다. 새정치민주연합(난 이 당명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명이 너무 길고, 약자도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은 4석에 그치는 참패를 했다.
당사자는 몰랐을 수 있지만,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사람은 별로 없었으리라. 공천파동부터 시작해서 야당이 보여준 모습은 그야말로 지리멸렬했다. 대부분의 언론들도 야당의 참패를 자업자득으로 본다.
과연 그럴까? 이번 선거가 야당이 그간 너무도 정치를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져야만 하는 선거였을까?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 국민 수준과 일치한다’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정치라는 게 유권자의 정치참여를 통해 이루어지는 바, 국민 수준이 엄청나게 높은데 정치만 진흙탕에서 뒹구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국민은 위대하다”는, 정치인들이 노상 하는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정치인들 중 정말로 국민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정말 국민이 똑똑하다고 생각한다면 지난 대선 때 정보기관이 댓글 공작을 벌이고, 몇 십 년 간 우려먹은 구태의연한 색깔론을 선거의 주된 쟁점으로 부각시킬까?
대운하 사업에는 반대하면서 이름을 4대강 사업으로 바꾸자 찬성으로 돌변하는 게 우리 국민들이라면, 여당과 야당이 지금 보여주는 모습은 정확히 우리 수준의 반영이라 봐야 한다.
물론 집권세력이 분탕질을 치는 와중에 엄청나게 훌륭한 야당이 존재한다면 좋겠지만, 그걸 바라는 건 크립톤 행성에서 슈퍼맨이 날아와 외계인을 막아내는 것처럼 턱없는 기대다.
혹자는 “과거 야당은 이렇지 않았다”라며 지금의 야당을 비난하지만, 이거야말로 과거를 아름답게만 보는 추억의 감성팔이다. 군사정권을 종식시켜야 할 1987년 선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을 깨고나와 야당을 분열시킨 장면이나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고 난 뒤 자기당 후보를 흔들던 민주당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지금 야당이 특별히 더 모자란 건 없어 보인다.
2012년 대선은 야당으로서는 선거에서 이길 절호의 기회였다. 허풍으로 끝난 747공약을 비롯해서 이명박정부는 민간인 사찰, 내곡동 땅, 친인척 비리 등 숱한 잘못들로 점철된 5년을 보낸 터였으니까.
얼마 전 미국의 전 하원의원이 박근혜 정부 들어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면서 “미군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마라”고 일침을 가했지만, 그 터를 닦은 분은 바로 위대한 각하셨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정권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졌어야 하건만, 우리나라는 유감스럽게 그런 상식이 통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세월호 침몰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지만 여당인 새누리당은 놀랍게도 6.4 지방선거에서 패배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한 달여 만에 열린 재보선에서는 숫제 압승을 한다.
야당이 잘 못했고, 그래서 이 패배가 당연하다고 비판하기 전에 우리는 이걸 물어야 한다.
“여당은 잘 했는가?”
간첩을 만들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는 것도 모자라 어마어마하리라고 추측되는 세월호의 진실을 감추기 위해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특별법을 유언비어를 동원하면서 뭉개고 있는 집권세력의 행태는 덜 떨어진 야당에 비해 수십 배 더 나쁘건만, 왜 패배의 원인을 야당에만 돌리는 것일까? 선거라는 게 집권세력에 대한 심판이지, 야당에 대한 심판이 아닌데 말이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언론이나 정치인이나 국민들을 등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늘 표가 아쉽고, 언론은 판매부수가 줄어들까봐 국민에게 쓴소리를 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국민들은 자신들이 위대하다고 착각하고,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며 정치인을 꾸짖는 사람들까지 있다.
진실은 이렇다.
우리 국민들은 철지난 색깔론에 세뇌당하고,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에 열광해 자기 지역 후보에게 표를 던진다. 반대 편 세력이 무상급식을 주장하면 나라가 거덜난다고 난리를 치면서도, 우리 편이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을 주겠다”고 하면 열광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집권기간 내내 50%를 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자기네 세력이 어떤 짓을 해도 지지하겠다는 고정표가 많다보니 선거를 통한 심판은 이루어지지 않고, 집권세력이 구태여 깨끗하고 바른 정치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야당에 대한 쓴소리도 필요하지만, 그 비난을 유권자에게도 좀 나눠드리자.
새누리의 나라가 계속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말이다.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새겨보자
사소하지만 좋은 삶을 살게 해주는 7가지 조언
[줄리아 투자노트]
머니투데이 권성희 부장 |입력 : 2014.08.02 10:00
지나온 길은 확실하게 보인다. 어디에 걸림돌이 있고 어디에 구덩이가 있으며 어디에 고속도로가 뚫려 있고 어디가 평탄한 길인지. 그래서 되돌아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때는 왜 거기 함정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 함정만 피해 갔다면 훨씬 편안한 인생을 살 수 있었을텐데. 하지만 후회만 하고 있을 순 없다. 지나온 길에 대한 깨달음은 앞으로 갈 길에 대한 나침반이 될 수 있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녀들, 혹은 후배들에게 전해주면 좋을만한 지침이 되는 조언을 소개한다. 미국의 교육 심리학자이자 행동 치료사인 사라 캐시디 박사의 글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1. 어떤 일이든 끝까지 하라〓지속성은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힘들다고 중간에 포기해 버리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 수학 문제든, 피아노 연주든, 마라톤이든 ‘더 이상은 못 하겠어’라는 생각이 들 때 ‘힘 들어도 끝까지 해보자’라고 마음을 바꾸면 인생이 달라진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시작을 잘하는 것이다. 자신의 역량이나 성향도 모른 채 준비 없이 무턱대고 일을 시작했다가 그저 ‘끝을 보자’며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은 무모할 뿐이다.
2.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모든 사람들이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란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거나 영향력이 큰 사람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람이 되기 전에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다시 말해 기본적인 윤리의식과 도덕심을 갖는 것이다. 바른 마음이 전제되지 않은 성공은 모래 위의 성이다.
3. 술집이나 클럽에서 사랑을 찾지 말고 도서관에서 찾으라〓왜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더 결혼할 상대는 물론 연애할 상대도 찾기가 어려워진다. 독신이 늘어나고 결혼연령이 늦어지는 세태가 이를 방증한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사람을 못 만나서 ‘싱글’이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사람들이 자주 가는 장소에 찾아가는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술집이나 클럽을 전전하는 사람인가, 도서관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인가.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다.
4. 술주정뱅이나 고집쟁이와는 논쟁하지 말라〓술이 취하면 이성이 마비돼 엉뚱한 말을 하거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런 사람과 논쟁해봤자 시간낭비다. 자기 생각에만 몰입해 있어 남의 말은 듣지 않는 사람과 논쟁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지적 그릇이 작아 더 이상 남의 의견을 담을 능력이 안 된다고 이해해주자. 억지로 그 머리에 당신의 의견을 집어넣으려다간 불필요한 싸움만 일어나게 된다.
5. 공부는 평생을 지고 다녀야 하는 인생의 필수품이다〓공부는 인생을 살아나갈 때 갖고 다니기에 너무 무거운 짐이 아니다. 무거워서 내려놓고 갈 생각은 말아야 한다. 공부는 평생을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필수품이다. 더 많이 알아갈수록 더 많은 기회가 생기고 더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다.
6. 사건 자체보다 사건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그 사건을 처리하는 방법에 영향을 미친다. 사건 자체보다는 그 사건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중요하다. 똑같은 시련을 당해도 어떤 사람은 좌절해 실패한 인생을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극복해 성공한 인생을 살아간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과 태도다. 그리고 생각과 태도는 그 시련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생이 장편소설이라면 지금 일어난 어려운 일은 그 소설 속에 짧은 한 장에 불과하다.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석해 소설로 쓸 것인가. 지금 당신이 쓰는 이 장의 내용이 소설의 결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잊지 말라.
7. 야채를 먹고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차로 가지 말라〓성공적인 인생의 제1 조건은 건강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건강을 지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매일 야채를 먹고 가능한 많이 걷는 것이다. 굳이 영양제를 챙겨 먹고 헬스클럽에 다니지 않아도 된다. 야채를 적당히 먹고 가까운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6개월간 운동을 하게 한 뒤 인지능력을 테스트한 결과 인지능력이 20% 상승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손학규는 다르구나.
구차하지 않았다.
손학규 정계은퇴 선언문 전문
국민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손학규입니다. 저는 오늘 정치를 떠납니다.
손학규가 정치를 그만두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겠습니까만 저와 함게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 동지들 어려운 상황마다 도움을 주셨던 지지자 여러분, 그리고 분에 넘치는 사랑을 주셨던 국민들께 인사드리고 떠나는 게 도리라 생각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정치인은 선거로 말해야한다는 게 저의 오랜 신념입니다. 저는 이번 7.30 재보선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뜻을 겸허히 받아 들이고자 합니다. 저 자신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국민들의 판단이 민주당을 비롯한 한국정치 변화에 대한 국민의 여망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1993년 정치에 입문한 이래, 분에 넘치는 사랑과 기대를 받았습니다. 2007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시베리아 땅으로 나선 이래 민주당과 함께 한 저의 정치 역정은 순탄치는 않았지만 보람있는 여정이었습니다. 민주당에 대한,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저의 사랑을 다시 고백합니다. 정치인은 들고 날 때 분명해야한다는 게 제 평소 생각입니다. 순리대로 살아야한다는 것 또한 저의 생활 철학입니다.
지금은 제가 물러나는 게 순리라고 생각 했습니다. 책임정치의 자세에서도 그렇고, 민주당과 한국정치의 변화와 혁신의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국민여러분께 함께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저녁이 있는 삶을 돌려드린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떳떳하게 일하고 당당하게 누리는 세상, 모두 함께 일하고 일한 만큼 모두가 소외받지 않고 나누는 세상, 그런 대한민국을 만들려 했던 저의 꿈을 이제 접습니다.
능력도 안되면서 짊어지고 가려했던 모든 짐들을 이제 내려놓습니다. 그동안 정치생활에서 얻은 보람은 간직하고 아쉬움은 뒤로 하고 떠나려고 합니다. 이제 시민의 한사람으로 돌아가 성실하게 살아 가겠습니다. 저녁이 있는 삶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고 노력하는 국민의 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마도 대략 인생의 절반가량을 살고 반환점을 돌고 있는 지금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
글을 2번 읽어봤다.
**
신사역 근처에서 저녁을 먹는 내내 어찌나 다들 떨던지, 놀러가기 위해 가는 클럽임에도 우리는 마치 엄한 곳에 팔려가는 것 마냥 초조했다.
결국 우리는 소나기를 뚫고 신사역에서 학동역까지 삼십분 간 빗길을 걸었다. 클럽 가는 길이 어찌 그리 멀고도 험한지, 우산을 썼음에도 옷이 비에 젖는 바람에 설레임도 흥분도 없이 암담하고 초라할 뿐이였다.
**
그 신사역에서 옥타곤까지의 오르막길을 소나기속에 걸었다는 내용을 보다가
가슴이 먹먹했다.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장애인의 옥타곤 클럽 체험기
👤변재원 댓글 20 개 📁 문화 🕔2014/07/29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장애인의 옥타곤 클럽 체험기
우리는 대학생이다. 그러나 대학 졸업을 앞두고도 누구 하나 아직까지 클럽에 가본 적이 없는 대학생이다. 아프니까 청춘이기 전에 아프니까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청각장애인 친구들은 클럽 내에서 의사소통이 어려워 어울리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시각장애인 누나는 혹시라도 어두운 클럽 환경에서 실수를 할까하는 두려움에. 전동휠체어를 탄 형은 입구로 들어가는 계단으로 인해 클럽 입장이 불가능해서, 그리고 목발을 짚은 나는 키가 작고 걸음걸이가 느려 혹시 무시당하거나 인파에 치일까 걱정이 되어서이다.
거기에 더해 장애인들의 마음속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근본적인 두려움. ‘과연 장애인이 클럽에 가도 될까’. 물론 장애가 주홍글씨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신체적 불편함과 다른 외모 그리고 체형이 타인에게 있어 이질감, 더 나아갈 경우 일종의 혐오감까지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조심스러움과 부담감이 교차했다.
위처럼 숱한 두려움과 어려움이 공존하지만, 그럼에도 장애인이 ‘클럽에 방문하는 것’은 대다수 장애인들의 매력적인 버킷리스트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 모두 클럽에서 EDM[Electronic Dance Music] 감상하기를 꿈꾸고, 화려한 조명 아래 춤추고 뛰놀며 다함께 부대끼며 소리지르기를 좋아한다. 또 새로운 환경에서 인연과 친구를 만나는 것도 기대한다. 클럽이 주는 환상과 매력은 우리 장애인에게 있어서도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클럽에 가본적은 없지만 클럽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여 생애최초로 클럽 방문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서로 다른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철저히 서로의 눈과 귀 그리고 다리가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우리는 ‘반지 원정대’가 아닌 ‘클럽 원정대’를 결성했다. 앞으로의 칼럼을 통해 ‘장애인 클러버가 되기까지’에 대한 체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클럽
지난 6월 16일, ㅍㅍㅅㅅ에 ‘지체장애인이 UMF에서 살아남는 법’을 기고하고 난 뒤 뜨거운 관심과 응원의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당시 UMF에서 만났었던 인연들과도 또 연락이 닿았고, 새로운 인연들과도 다음 축제에서만큼은 함께하기를 기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2015년 UMF를 기다려야지’ 하는 생각이 전부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꼭 1년에 한번 있을 대형 축제에서만 내가 자유로이 놀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더해갔다. 더 이상 대형축제만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당장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고 싶은 욕구가 더해졌다.
아… 아무래도 내 몸에 춤망령이 제대로 붙은 것 같다. 눈만 뜨면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는 클럽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으니 말이다. 장애인이 클럽에 간다니. 뉴욕이나 베를린에서나 가능한 일일 줄 알았다.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을 환영하는 클럽이 있을까?’ 한국의 클럽문화에서 장애인은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 아닐까 걱정됐다.
하지만 그런 시선은 아무래도 좋았다. 당장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춤추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 경험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설령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으로 비춰질지언정 일단 클럽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대학교 신입생 때만해도 또래 동기들을 클럽에 가는 것을 보면서 부러워만 했을 뿐, 내가 직접 클럽에 갈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후로 한동안 나는 유투브로 서울에 위치한 모든 클럽 영상과 후기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화려한 영상들을 볼 때마다 결심은 더욱 확고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갑작스레 친구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형.누나, 우리 클럽 갈레요?’
사전 컨택
당장 어느 클럽에 입장할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였다. 강남에도 홍대에도 클럽은 많지만 과연 전동휠체어가 입장할 수 있는 클럽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로부터 옥타곤은 입장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조언을 들었다. 옥타곤은 옆 호텔의 엘리베이터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체장애인이 UMF에서 살아남는 법’을 기고하고 난 뒤, 많은 EDM 매니아들과 페이스북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 중 한 페친이 우연히도 클럽 옥타곤의 관계자였던 것이 문득 생각났다. 페이스북 친구사이이긴 하나, 교류 한번 없었던 사이인데 과연 연락을 해도 될지 고민이 됐다.
현실적으로 고려해봤을 때 ‘장애인의 클럽 방문’을 관계자의 입장에서 환영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판단임이 분명했다. 하물며 나 혼자도 아니고 각기 다른 장애를 가진 친구들 4명과 함께 방문한다니 말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안전상의 문제로 조심스럽게 거절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결국 연락하기를 단념했었다. 그리고 클러버가 되기로 한 계획들은 모두 흐지부지 되는 것 같았다.
문제는 이 놈의 춤망령은 내 곁에서 떨어지질 않는 것이였다. 마음을 달래려고 유투브를 통해 클럽실황을 봤지만, 오히려 움츠러들었던 가슴이 다시 마구 뛰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거절을 당하더라도 일단 연락은 해보자고 결정했다. 그 길에 곧장 나는 무작정 페친인 그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저는 페이스북 친구 변재원입니다. 제가 몸이 불편해서 아직 클럽을 가본 적이 없는데 최근 EDM을 꾸준히 들으면서 클럽 특히 옥타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한편으로는 과연 제가 가도 되는 곳일까 싶기도 하네요.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음… 전동휠체어를 탄 형이 한분 계시구요… 저는 목발을 짚었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지체장애인 두명, 그리고 청각장애인 형,누나 두명 시각장애인 누나 한명입니다… 혹시 저희도 입장할 수 있을까요?”
옥타곤에 직접 전화해 물어봤어도 됐겠지만, 그당시 나는 육성을 통해 물어볼 용기도, 대답을 들을 자신도 없었다. 결국 페이스북 메시지를 전송한 뒤로 괜히 민망해 한동안 페이스북에 접속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별 일 아니지만, 당시에는 왠지 모르게 너무 미안하고 괜히 부끄러웠다.
얼마 후 관계자의 답장이 왔다. 너무도 뜻밖의 답장이였다.
‘안녕하세요! 장애인 출입이 안될 이유가 뭐가 있죠? 옥타곤에 와주신다니 저희로선 오히려 너무 감사하지요. 혹시 휠체어 입장이 걱정이라면, 옥타곤에는 계단을 거치지 않고 윗층 아래층 오갈 수 있으며, 무료게스트를 받고 있지 않으므로 인파 속에서 사고가 날 위험도 덜합니다. 마지막으로, 스탠딩이든 테이블이든 손님들의 의식수준도 대한민국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옥타곤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방문하시기 편한 날짜를 고려해본 뒤, 추천 일정과 함께 자세한 내용 안내해드릴께요.’
한동안 예상치 못한 답장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혹시 내가 잘못 읽은 건 아닌지 몇 번에 걸쳐 내용을 곱씹어봤다. 그리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리가 방문했던 날의 테마>
입장
이후 일주일동안 관계자분과 지속적인 연락을 나누며 추천 일정을 토대로 방문 날짜를 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휠체어가 입장할 것인지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휠체어 규격을 미리 알려달라는 등 입장에 불편함이 없도록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해주셨다.
결전의 날인 7월 25일 금요일, 우리는 강남으로 향했다. 신사역 근처에서 저녁을 먹는 내내 어찌나 다들 떨던지, 놀러가기 위해 가는 클럽임에도 우리는 마치 엄한 곳에 팔려가는 것 마냥 초조했다. 거기에 때 아닌 소나기까지 더해졌다. 우리 일행 중에는 전동휠체어를 탄 형이 있었기 때문에 설령 비가 내릴지언정 택시를 탈 수는 없었다. 장애인 콜택시를 타자니 금요일 밤에 타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시간 전에는 미리 예약을 해야만 했다.
걸어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소나기를 뚫고 신사역에서 학동역까지 삼십분 간 빗길을 걸었다. 클럽 가는 길이 어찌 그리 멀고도 험한지, 우산을 썼음에도 옷이 비에 젖는 바람에 설레임도 흥분도 없이 암담하고 초라할 뿐이였다.
10시 50분, 마침내 클럽에 도착했다. 옥타곤 관계자분께 전화를 했고, 잠시후 그는 우리를 맞으러 클럽 입구로 마중 나왔다. 보안요원 네 분께서도 함께 따라 왔다. 전동휠체어를 클럽에 입장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모인 분들이다.
입구 계단을 이용할 수 없었던 우리는 클럽과 연결되어 있는 호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백스테이지를 우회한 끝에서야 성공적으로 클럽에 입장할 수 있었다. (수고해주신 보안요원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백스테이지를 우회하여 입장하는 모습>
In the club
오후 11시, 아직은 이른 시간이여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한산했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12시 전,후부터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새벽 1시~2시 사이에 피크를 찍는다고 한다. (사실이었다. 불과 한,두시간 사이에 클럽 안이 가득 찼다.)
우리 입장에서는 오히려 한산한 시간에 도착하길 잘했다. 덕분에 보안요원분들께서 적극적으로 전동휠체어 진입에 신경써주실 수 있었고, 클럽 내부를 이해하고 탐방하는데 있어서 역시 최적의 시간이였다. 우리는 한참 내부를 돌아다니며 클럽 안의 테이블, 바, 스테이지, 조명을 관찰했다. 또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 또 라운지에서 디제잉을 감상했다. 모든 것들이 새로웠다. 우리 정말 클럽에 왔구나!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인파가 모여들 때까지 어디에서 시간을 보낼지 서성이고 있었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옥타곤 관계자분께서 자신이 이용하는 테이블에서 함께 휴식을 취하자고 권해주셨다. 호의는 감사하나 우리에게 너무 과분한 것 같아 한사코 거절했지만, 관계자분께서는 지칠 때만큼은 잠시 함께 나눠 쓰자는 취지일 뿐이니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편히 쉬라고 말씀하셨다.
관계자 분의 배려 덕분에 청력문제로 스테이지에 오래 상주하기에 부담스러운 농인 친구들과 전동휠체어를 탄 형, 그리고 나 또한 춤을 추다 힘들 때 가끔 테이블 근처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테이블과 스테이지 사이에 낮은 턱이 있었지만 매번 주변 분들이 함께 힘을 모아 형의 전동휠체어를 뒤에서 받쳐주며 올라가곤 했다.
12시, 본격적으로 모여들 시간이다. 짐을 테이블 근처에 정리하는 사이 휠체어를 탄 형은 2층에서 스탭들의 도움을 받아 삐에로 분장을 하고 왔다. 다들 저 나름 놀 준비를 끝마쳤다. 11시까지는 한산한 라운지 주변을 탐색하며 천천히 둠칫둠칫대며 한가롭게 즐겼다면, 이제는 서서히 난리의 조짐이 보인다. 방방 곳곳에서 각자 신이 나서 떠들썩해지고 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부끄러운 마음에 한참 두리번대며 주변을 의식했다. ‘우리도 저들 틈에 함께 어울려 춤을 춰도 될까?’하는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중에 나는 비록 한번 뿐이기는 하지만 나름 UMF 경험자라고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스테이지로 뛰어들어 둠칫둠칫. 서서히 긴장이 풀린 각자 모두 다들 스테이지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했다. 클러버 틈사이에서 그 나름 열심히, 다소 어색한 몸부림을 부렸다.
우리 외에도 스테이지는 인파로 가득찼기 때문에 어느 누구하나 우리의 어색함을 뚫어져라 관찰하는 사람은 없었다. 각자가 이 밤을 충실히 즐기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예상과 달리 인파로 가득 찬 클럽 스테이지를 보면서 생각했다. 불금의 클러버들에게 있어 오늘 밤 소나기 따위는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구나.
클럽
장애인이 클럽을 즐기는 방법
‘장애인들이 클럽을 어떻게 즐기는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전동휠체어를 탄 형의 경우에는 후천적으로 장애를 얻게 된 케이스다. 원래 형은 실내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 재작년에 건축사무소 동료들과 다 같이 워크숍의 일환으로 놀러가 냇가에서 다이빙을 하던 중 착륙 지점을 잘못 딛어 경추 5,6번이 다쳤다. 그 뒤로 오랜 재활과 회복을 거친 끝에 지금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하체를 사용하지 못함은 물론, 팔을 이용하는데 있어서도 자유롭지만은 않다. 손에 쥐는 힘이 없어 야광봉을 쥐고 흔들 수 없을뿐더러, 팔을 높이 위로 뻗는 것도 불가능하다. 손은 오직 앞으로만 그리고 아주 약간 옆으로 뻗을 수 있다. 복부에 힘이 없기 때문에 환호를 지를 수도 없다. 따라서 그가 스테이지를 즐기는 방법은 우리와는 조금 다르다. 방방 뛰며 팔을 높이 뻗는 대신, 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리듬에 맞춰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면 즐기면 된다. 더불어 주변 거리가 확보되어 있을때는 전동휠체어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나름의 묘기를 부릴 수도 있다.
장애인이 되기 전까지 한 춤바람 했었던 기억을 되살려 그 나름 아주 여유롭게 즐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형만이 할 수 있는 궁극의 퍼포먼스가 있다. 바로 전동휠체어의 비상전조등을 활용하는 것이다. 전동휠체어 하단에 부착된 전조등이 수시로 반짝이며 스테이지 주변을 빛내고 있다고 상상해봐라. 실제로 형의 비상전조등은 많은 클러버들에게 있어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내,외국인 할 것없이 형의 전조등 퍼포먼스에 속속히 모여들어 감탄 또 환호했다.
새벽에 옥타곤에서 우연히 만난 가수 싸이와 YG 양현석 대표 또한 전조등 퍼포먼스에 박수를 보냈다. 전동 휠체어를 자신있게 드러냄과 동시에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최상의 묘기였다.
함께 동행한 시각장애인 누나의 경우도 형의 전조등 덕분에 더욱 안전하게 즐길 수 있었다. 누나는 형의 전동휠체어를 잡고 함께 동행하면서 주변의 안전거리를 확보하며 즐겁게 춤을 추며 놀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도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인데 누나의 시각장애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태양과 같은 자외선 아래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어둠에 적응한 나머지 오히려 조금의 어둠속에서는 남들보다 더 잘 보인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능력은 클러버가 되기 위해 타고난 장애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정말 물 만난 물고기마냥 스테이지안을 방방 뛰며 함께 춤을 췄다. 누나가 사람들과 어울려 이렇게까지 즐거워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휠체어
청각장애인 형, 누나는 둘 다 국가대표 선수이다. 각각 2013년 소피아 데프림픽에서 수영선수로, 태권도 선수로 출전했었다. 이들은 따로 염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건강했다. 다만 대화를 나누는 데 있어 유의해야할 부분이 있었다. 클럽에 보청기를 끼고 올 수 없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만약 클럽에 보청기나 인공와우를 끼고 온다면, 커다란 사운드가 장치 너머로 다시 증폭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청력에 심각한 손상이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청각장애인들은 음향이 큰 장소에 보청기를 끼고 오지 않는다.
보청기를 끼고 오지 않았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앞서 말했듯 바로 옆 사람과의 의사소통이다. 그들은 상대의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입모양을 보며 구화를 하면 되겠지만 어두운 클럽 내 분위기로 인해 이조차도 어려움이 있다. 때문에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가까이서 천천히 또박또박 입을 크게 벌려 말하고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손동작을 더해야 한다. 또 긴급한 상황에 대비해 ‘카톡 확인 바람’ ‘비상상황’ 등 과 같은 기본적인 수화동작은 사전에 익혀두는 것이 좋다.
과연 청각장애인들도 음악감상하는 것을 좋아할까? 당연히 좋아한다. 아주 또렷하게 듣지 못할 뿐, 그들 역시 음악을 감상하고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보통 장애인이라고 하면 극단적인 경우만을 생각하곤 하는데, 특히 시각장애인의 경우는 볼 수 없고 청각장애인의 경우에는 들을 수 없다고 쉽사리 오해하곤 한다. ‘-장애’는 해당 부위에 한해 비장애인들에 비해 기능이 저하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항상 불능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농인인 형,누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또렷이 듣고 이해할 수 없지만 충분히 리듬에 몸을 맡겨 신나게 즐길 만큼은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나 클럽과 같은 커다란 스피커 주변에서는 더욱 편하게 말이다. 다만 스피커의 진동으로 인해 때로는 박자를 잡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비장애인들이 즉각적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반응한다면, 청각장애인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스피커의 진동을 통해서 리듬을 인식하고 반응하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이에게는 이들의 반응이 다소 엇박자로 느껴질 지도 모르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나름 주변의 호응을 살피며 리듬을 적당히 조율한다. 밤새 박자를 계산해가며 어울려 춤을 추느라 내내 땀을 뻘뻘 흘렸지만 어쩐지 전혀 피곤해보이지 않았다. 클럽에서 나오는 길에 형이 내게 말했다. ‘스테이지 어디에 서있든 항상 심장을 퉁퉁 치며 울리는 스피커의 진동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 처음 경험해본 흥분과 감동이야.’
나의 춤 패턴은 지난 칼럼에 묘사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단조로운 몇가지 스텝을 토대로 이 사이 저 사이를 목발을 짚으며 뛰어다니며 내 나름 둠칫둠칫. 그리고 신이 날 때는 한쪽 목발을 하늘 높이 들어 격정적으로 콩콩콩! 댄스배틀을 걸어올 경우에는 피하지 않고 그 나름의 현란한[조잡한] 목발 지그재그를.
UMF 당시에는 다소 소극적으로 외국인 친구들만을 중심으로 어울렸다면,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스테이지 내 모두가 함께 어울려 호흡을 맞췄다. 휠체어에 앉아 있을지언정, 엇박자로 춤을 출지언정, 목발을 짚고 엉성하게 뛸지언정 그 누구도 우리를 불편해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들도 없었다. 그날 밤만큼은 우리 모두 조금씩 다른 특징을 지닌 클러버일 뿐이다. 처음 만난 인연들과 함께 우리는 밤새 스테이지에서 맥주를 나눠 마시며 즐겁게 춤을 췄고 음악을 감상했으며, 환호를 지르고 또 질렀다.
P.S) 싸이
열정적인 분위기는 새벽을 훌쩍 지나 아침까지 이어졌다. 마감 때까지 노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다음날 각자 스케쥴을 고려해 슬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때마침 클럽에 싸이와 YG 양현석 대표가 왔다. 스테이지에는 그들을 중심으로 둥그런 대형이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나도 잠깐 구경만 하러 간다는 것이 갑자기 누군가 나를 무대로 불러내는 바람에, 졸지에 싸이와 마주하며 춤을 추게 되었다. 춤을 썩 잘추지는 못했지만 내 나름 흥분된 분위기를 이어나가기 위해 목발을 높이 들어 뛰며 환호를 유도했다. 그리고 나서는 최대한 격정적으로 스텝을 잠깐 밟다가 자연스레 빠져나와 싸이와 악수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싸이의 손은 굉장히 크고 묵직했다.
휠체어를 타고 있던 형의 경우에는 더 이상 안으로 진입할 수 없다고 요원들이 말렸으나, 현장의 외국인 친구들이 형을 대신해 인파를 가르기 시작하면서 길을 터주었다. 순식간에 작은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형은 그사이로 늠름하게 전동휠체어를 끌고 들어갔고 비상 전조등을 스포트라이트로 켰다. 주변에서 모두 환호하기 시작했다. 전조등 조명까지 갖춰진 이상 스테이지 안에 또 하나의 조그마한 자체 스테이지가 만들어진 셈이나 다름없었다! 싸이와 양현석 대표가 떠날 때까지 관객 모두들 자리를 지키며 비상 전조등 조명 아래서 댄스 배틀을 이어나갔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도 다음을 기약하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에는 몰랐었는데 집에 돌아온 지금 모두들 팔다리 어느 하나 알 배기지 않은 곳이 없다. 내 경우는 목발을 짚고 하도 뛰어 그런지 겨드랑이가 아파 죽겠다. 그래도 좀 아프면 어떤가. 지난밤 우리는 평생 갈 수 없을 것만 같던 클럽에 갔고, 또 차별없이 함께 어울려 즐겼다. 어느 해외사례도 아닌 바로 이 곳, 서울에서 해냈다. 이쯤이면 일주일 내내 몸져누워도 억울하지 않다.
<스테이지에서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싸이 / 길을 터주면서 함께 어울린 외국인 친구>
후기
클럽을 나서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동시에 질문을 건냈다. ‘지난 열흘간 본업 이외에도 저희를 신경 쓰느라 상당히 많은 준비를 하신 걸로 아는데요, 이미 충분히 바쁘실텐데 어떻게 흔쾌히 승낙해 주신 건가요?’
나는 답변으로 거시적인 장애복지나 인권에 대한 그의 가치관 혹은 장애인 친구를 둔 경험담 등을 인용하여 한참 설명하리라 생각했다. 그의 대답은 예상 외로 간결했다. ‘처음 오픈할 때 공사를 다 마치고 한쪽 벽에다가 이렇게 새겼어요. Anything can happen here. 그게 다에요.’ 나는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었다. 조용히 클럽 밖으로 나왔다. 이미 떠버린 아침 해를 등지고, 마지막 작별인사로 손바닥을 크게 한 번씩 부딪혀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헤어졌다.
다름을 인식하는 것은 간단하다. 하지만 다름이 곧 같음임을 인지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오늘밤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은 분명 모두 다른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같음을 인지하는 사람들이였다. 우리는 막연히 밤새 춤을 추고 노래를 들을 수 있어서 즐거웠던 것이 아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변화를 기다리는 이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즐거웠다. 또 언젠가 이겨내야 할 시선을 극복할 수 있어서 의미가 더욱 깊다.
장애인에게 있어 클럽은 하나의 극복해야 할 공간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 클럽에 입장한 이상 현장의 어두움과 동시에 그 화려함을, 커다란 음향을, 인파를 극복하고 모두의 시선을 즐길 수 있어야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을 거리두지 않고 아무 거리낌 없이 함께 어울릴 수 있을 만큼 준비가 되었는지에 대한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
‘저기.. 전동휠체어 탄 형이 한명 있구요. 저는 목발을 짚었습니다. 음… 그러니까.. 결론은 지체장애인 두 명, 그리고 청각장애인 형.누나 두 명, 시각장애인 누나 한명 총 다섯명인데.. 저희도 입장할 수 있을까요?’를 물어볼때까지 나는 이번 도전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클럽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냥 앞서 연락했을 뿐이지, 실제로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을 환영하는 클럽은 없음을, 장애인 손님은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지난 금요일, 우리는 도전에 성공했다. ‘아마 안될꺼야’라는 생각에 내내 사로잡혀 그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아마도 그래,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달랬을까 싶다.
클러빙을 시도하는데 함께 용기를 주었던 ‘반지원정대’ 아닌 ‘클럽원정대’ 장애인 동료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와 함께 장애인으로써 커밍아웃하고 이 세상으로 용기내어 적극적으로 나서 준 점에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
활동보조에 신경쓰느라 고생하셨던 유윤석 형, 오늘의 칼럼을 위해 현장 사진을 찍느라 고생해주신 김협 형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클럽 옥타곤 측이다. 사실 이번 도전은 옥타곤이 아니였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도전이였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최근까지도 (휠체어를 타고 있지 않았음에도)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클럽 입장을 거절당한 친구도 있다. 한국사회에서 대다수의 장애인들은 차마 이러한 대응에 적극적으로 항의하기는커녕, 어쩔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슬픔을 삼켜 넘기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장애인 당사자들보다도 더욱 긍정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초대해주신 옥타곤 측에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또 동선을 확보하기 위해 백스테이지를 정리하느라 애쓰신 옥타곤 보안요원 분들, 무엇보다도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 없이 함께 하룻밤을 불태워준 옥타곤 게스트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우리가 안전하게 즐길 수 있도록 지난 2주간 매일 밤낮으로 계획해오신 옥타곤 마루 피디님께 가장 감사하다.
앞으로 장애인 클러버로써 즐길 날들에 대해 항상 오늘과 같은 배려를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이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칼럼을 남겨 기억을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얼마나 어느정도의 배려를 받았는가에 주목하기 이전에, 장애인들도 똑같은 욕구를 가지고 여러분들과 함께 불금을 어울리고 싶어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지난 밤의 기억을 토대로 장애인이 클럽에 방문하는 일이 결코 불가능한 명제가 아님을, 우리는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 아니라 어쩌면 더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다양한 사람임을 말하고자 한다.
모든 장애인들이 클럽 입구에서 그들의 장애를 커밍아웃할 수 있도록 나는 앞으로도 투쟁[?]의 일환으로 더욱 열심히 클럽을 다니겠다. 다음에 만나면 나와 함께 춤을 춰요!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