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

사진의 수준

요즘 본의 & 본의아니게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빈번히 보면서

사진을 보는 시각도 조금 바뀌고
내가 보기에 좋은 사진과 그렇지않은 사진을 구별하는 시간도 짧아진다.

내가 좀 더 좋아하는, 하지만 잘 못찍는 사진은 위와 같은 사진이다.

감흥을 별로 못느끼는 사진은, 소위 “포인트”가 없거나 카메라/렌즈 자랑하는 사진들, 그리고 (나도 반성하지만) 뻔한 사진들

2016-01-02T22:43:03+09:00Sat 02 Jan 2016 10:43 PM|

Bye 2015

2015년은 나에게 큰 전환점이 있었던 해였다.

8월에는 8년간 다닌 회사를 그만두었고

9~12월에는 3개월간 내 인생에 가장 긴 여행을 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내 인생 방향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한순간 한순간은 괴롭고 어려웠지만
그 해를 넘기는 지금은 괜찮아졌다.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올해가 빨리 지나가길 기다렸다.

내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많은 도전과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행 때 배우고 느낀 것을 잃지않을 생각이다.

2015-12-31T23:18:50+09:00Thu 31 Dec 2015 11:18 PM|

사진 홈페이지 개장

며칠간의 노력 끝에
아직 완전히 완성한 것은 아니지만
아래와 같이 만들었습니다.
(요즘 세상 좋아졌네요 예전보다 홈페이지 만들기가 훨씬 쉬워져서…)

정말 정말 심심하실 때에 구경해보시면 재밌지않을까 생각되고.,
혹시 에러가 있거나 한 부분 있다면 알려주십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김혁진 배상

http://www.hyukjinkim.com

2015-12-31T01:42:04+09:00Thu 31 Dec 2015 1:42 AM|

위안부 협상

이런건 왜 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차피
피해자는 사과를 받을 의향이 없었고
가해자도 사과를 할 의향이 없었다.
배상을 한다 해도 양쪽이 만족스러울리 없다.

이러나 저러나 욕먹을 일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2015-12-28T20:47:16+09:00Mon 28 Dec 2015 8:47 PM|

카메라 0대

카메라가 3대 있었는데 지금 수중에는 하나도 없다.

1대는 팔았고
1대는 수리받으러 독일로 보내졌고
마지막 1대 역시 수리 받으러 한국의 수리센터에 있다.

1대라도 있을 때에는 몰랐는데
막상 아무것도 없으니 카메라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새삼 이해가 된다.

2015-12-24T17:17:24+09:00Thu 24 Dec 2015 5:17 PM|

홈페이지 로고

사진 홈페이지의 로고를 만들고 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주소창에 보아는 조그마한 로고)

이름을 이용해서 만들어보고 있는데

1차로 슥삭슥삭 만든건 이정도인데 아무래도 좀 많이 뜯어고쳐야할 것 같다.

2015-12-23T05:24:48+09:00Wed 23 Dec 2015 5:24 AM|

사진 편집 anywhere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환경을 드디어 만들었다.

집에서 데스크탑을 사용하든
집에서 노트북을 사용하든
외부에서 노트북을 사용하든
아니면
아예 내 것이 아닌 PC나 노트북으로도

언제든 사진(raw파일)을 불러들여서 편집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제 정말 클라우드 시스템을 제대로 쓰는 것 같다.

2015-12-21T17:59:20+09:00Mon 21 Dec 2015 5:59 PM|

쿠바 사진

며칠째 미루어왔던 사진 정리 (추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쿠바 사진의 경우 처음엔 한가지 theme으로 합치려고 하다가
쿠바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있고 있기 때문에 하나로 설명할 수 없고,
결국은 3가지로 나누는 것이 적절해보여서 그렇게 하려고 한다.

1. 어린이들의 동심

2. legacy (old Cuba)

3. 변화하는 쿠바

사진 공모전에 낼 예정인데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여행을 다녀오니 아쉬운 점이 많다.
첨부 사진은 쿠바 사진 중에서 가장 아끼는 것.

2015-12-21T17:55:30+09:00Mon 21 Dec 2015 5:55 PM|

미움받을 용기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면 보이는 LCD창에서
베스트셀러 1위라고 하는 책 제목을 보고 뭔가 했는데,

하아…..
우리는 미움받을까봐 고민하고, 미움받을 용기조차도 큰 맘 먹고 내야하는 그런 나라에/시기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

‘미움받을 용기’는 기존의 자기계발과 뭐가 다른가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올해의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는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고 강조한다. 철저하게 개인의 변화를 강조한 이 책은 자기계발의 연장선에 있다. 다만, ‘경쟁’을 거부하고 공동체 감각에 근거한 ‘수평관계’를 지향하는, 시장원리를 넘어선 개인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자기계발담론과는 차이가 있다.

자존감은 두 가지 방향에서 형성된다. <자존감의 여섯 기둥>에서 심리학자 내서니엘 브랜든은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에 의해서라고 말한다. 내적 요인은 개인의 내면에서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외적 요인은 환경이다. 부모, 교사 등 의미 있는 타인부터 조직, 집단, 문화, 사회 모두 자존감을 형성하는 외적 요인이다. 내서니엘 브랜든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외적 요인의 역할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자신의 정체성과 능력, 가치를 분명히 아는 강인한 자기가 필요하다. 문화적 합의는 무너졌고, 중요한 역할 모델은 찾을 수 없다…. 외부에서 안정을 찾을 수 없다면 스스로 자기 내면에서 만들어야 한다.” 외적 요인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개인은 자존감을 형성하기 위해 스스로 강해지는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는 왜 ‘용기’가 필요할까

‘강인한 자기’에 대한 열망은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올해의 베스트셀러는 <미움받을 용기>다. 80만부가 넘게 팔렸다. 일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가 알프레드 아들러의 심리학을 소개한 책이다. <미움받을 용기>를 시작으로 아들러의 심리학을 다룬 <늙어갈 용기> <행복해질 용기>도 인기를 얻었다. 한국 사회에는 왜 아들러가 말하는 용기가 필요했을까.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아들러의 심리학 그 자체보다 책 제목인 ‘미움받을 용기’가 한국 사회 대중의 정서를 콕 찍어낸 것 같다. 갑을관계 등 한국 사회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책 제목이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미움받을 용기>를 시작으로 아들러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아들러 심리학은 살면서 직면하는 갖가지 문제들의 원인을 개인의 ‘용기’ 부족 때문이라고 말한다. 책 제목인 ‘미움받을 용기’도 같은 맥락이다.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인간관계로 고민하는 사람이 있어. 상사라는 인간이 사사건건 딴죽을 거는 데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인정해주기는커녕 얘기조차 들어주지 않네. 하지만 그 상사에게 인정받는 것이 자네가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일인가? 회사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게 일은 아니지 않은가? 상사가 자네를 싫어한다,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이유로 그런다, 그러면 더는 다가서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네.”(169쪽) 아들러 심리학은 스스로가 변하면 된다고 말한다. 과거의 특정 사건이 현재와 미래를 결정할 수 없고 개인은 ‘목적’을 위해 행동을 바꿀 수 있는 ‘변할 수 있는 존재’다. “상사의 눈 밖에 났으니 일할 수 없다. 내가 일을 잘 못하는 것은 상사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대개 잘 풀리지 않는 일에 대한 구실로 상사의 존재를 든다네. 그런 식으로 화를 내면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어. 저 상사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누가 봐도 원인론이지. 그러지 말고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상사를 싫어하기로 했다라거나 내 무능력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싫어하는 상사를 만들어냈다라고 생각하는 걸세.”(170쪽)

아들러 심리학은 철저하게 ‘내적 요인’만을 강조한다. ‘외적 요인’은 더 이상 변수가 아니다. 지은이 기시미 이치로가 지난 8월 23일 한국에서 열린 <늙어갈 용기> 출간 기념 좌담회에서 한 말이다. “아들러는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저 거기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외부 영역에 대해 자신의 의지로써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했다. 병에 걸린다거나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계속 화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들러는 인간은 그렇게 약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회가 안 바뀐다면 나를 바꾸자

‘내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아들러 심리학이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은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외적 요인’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의 분석이다. “올해의 키워드는 불안이다. 미래가 없다. 고용없는 성장에 취업도 안 되고 경제는 어떻게 될지 내다볼 수 없다. 개인은 모두 절망적인 위기로 내몰린 상황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더 이상 어떻게 성공하느냐가 아니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내고 이겨내는가가 됐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가 거세된 책”들이 몇 년간 강세를 보이고 있다며 <미움받을 용기> 열풍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분석했다.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의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다보니까 차라리 내가 변하자는 쪽으로 마음의 방향이 옮겨가게 된 것이다.” 이는 2011년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과 대비된다.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은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사고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정치가 퇴행하면서 개인들이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최근 들어 ‘사회가 안 바뀐다면 나라도 나를 바꾸자’라는, 축소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사회가 거세된 책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결국 관심은 자신에게로 향하게 된다는 분석이다.

그런 맥락에서 아들러 심리학은 사회 구조가 원인이 돼 발생하는 문제들도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 해법을 찾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8월 23일 좌담에서 기시미 이치로와 대담을 나눈 하지현 교수의 비판이다. “열심히 해라, 희망을 가져라, 너의 문제다,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려워도 낙관적인 생각으로 용기를 가지면 되는데 너는 왜 하지 않니. 이러한 가르침이 1980~1990년대 굉장히 많았다. 그런 가르침의 기저에는 아들러의 사상이 녹아 있다. 이 지점에서 비판이 제기된다. 사회환경, 시스템에 문제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과하고 개인의 노력과 용기에만 지나치게 방점을 두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하 교수의 지적처럼 아들러 심리학을 따라가다 보면 사회 구조가 원인이 돼 발생한 문제의 해법도 개인의 차원에서 찾게 된다. 아들러는 ‘인정욕구’에서 벗어나 공동체에 공헌하라고 말한다. “인정욕구의 진의를 생각해보게.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주목하는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즉 자신의 욕구를 얼마나 만족시켜주는가.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간은 얼핏 타인을 보는 것 같아도 실제로 자기 자신밖에 보지 않아.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지.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집착이나 다름없지.”(201쪽) 인정욕구를 버리게 되면 이제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공동체에 대한 공헌으로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 ‘여기에 있어도 좋다’라는 소속감을 갖기를 원해. 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소속감이 가만히 있어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네…. 내 발로 인간관계의 과제에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네.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해줄까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그것이 공동체에 공헌하는 길일세.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일세.”(216쪽) 소속감을 주는 공동체의 범위는 우주까지 확장된다. “자네가 학교라는 공동체만이 자네가 있을 유리한 곳이라고 생각한다고 치세…. 그런데 그 안에서 어떤 문제에 맞닥뜨리면 어떻게 될까…. 만약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느꼈던 고통이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눈앞의 작은 공동체에 집착하지 말게. 보다 다른 나와 너, 보다 다양한 사람들, 보다 큰 공동체는 반드시 존재하네.”(220쪽) 이러한 논리는 자칫 사회가 만들어낸 구조화된 실업, 양극화, 경쟁에서의 낙오 등의 문제들도 개인이 생각과 관점을 바꾸는 방식으로 해법을 찾아나가야 한다는 결말에 이르기 쉽다.

자기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절박한 모색

이는 <미움받을 용기> 또한 결국 신자유주의 시대 자기계발 흐름의 하나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배경이다. 자기계발의 한 흐름인 ‘심리화’는 모든 걸 개인의 심리의 태도로 이해하게 만든다. 서동진 계원예술대 교수의 분석이다. “자기계발은 현실의 문제를 ‘내가 지금 어떤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조건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내가 어떤 종류의 자질을 가지고 있느냐’는 관점으로 세상과 관계 맺도록 한다. 예컨대 내가 적극적인가, 능동적인가를 생각하면서 인생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가는 프로젝트나 기획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러한 흐름에서 심리 또한 능력이 된 셈이다. ‘미움받을 용기’ 또한 계발해야 할 심리적 능력이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말도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심리적 언어’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것이다. 특히 경제용어를 보면 더 그렇다. 예컨대 ‘벤처(venture)기업’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모험심과 사회성이라는 심리와 기질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들인다는 뜻이다. ‘리스크(risk)’도 마찬가지다.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것 또한 심리적인 능력이 된다. 적극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려는 능동적 태도다. 심리화는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불안이나 삶의 곤경도 개인의 심리적 언어와 태도를 통해서 해결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지은이 기시미 이치로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반박하면서도 아들러가 개인적인 측면만 강조했다는 것을 일부 인정한다. “아들러 또한 현실이 간단하지 않고 힘들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공동체에서 사람과 사람이 연결돼 있지만 그 안에는 분명 전쟁도 존재하고 개인 간의 싸움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여러 곤란한 상황이 있는 것은 맞지만 이를 현실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을 가져야 한다. 이상주의적인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 역시 아들러가 사회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것은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시장원리가 사회 질서를 대체하게 된 한국 사회에서 돈 때문에 개인의 존재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되는 것은 일상이 됐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는 그의 책 <모멸감>에서 한국 사회를 “고용주, 소비자, 주주, 공공예산 집행 책임 공무원 등 ‘갑’의 비위에 거슬리면 밥줄이 끊기기 십상이다. 그래서 삶을 지탱하는 소신과 원칙, 자기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마저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고 분석했다. 모멸감이 일상의 감정이 된 한국 사회에서 <미움받을 용기> 열풍은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절박한 모색인지도 모른다. 자존감을 지키는 ‘외적 요인’이 붕괴된 한국 사회에서 ‘강인한 자기’만이 자존감의 보루인 것이다.

<미움받을 용기>는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고 강조한다. 철저하게 개인의 변화를 강조한 이 책은 자기계발의 연장선에 있다.

다만, ‘경쟁’을 거부하고 공동체 감각에 근거한 ‘수평관계’를 지향하는, 시장원리를 넘어선 개인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자기계발담론과는 차이가 있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동일본대지진을 겪었다. 기시미 이치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는 출발점에 아들러의 심리학을 놓는다. 사회 구조의 문제를 축소하고 개인의 차원으로 해법을 돌린다는 점에서 이 출발점은 각자도생의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수용’ ‘타자 신뢰’ ‘타자 공헌’으로 이어지는 아들러의 ‘자기계발’ 회로는 세상에 맞춰가는 처세와 구별된다는 점에서 다른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2015-12-19T22:00:50+09:00Sat 19 Dec 2015 10:00 PM|

의식의 지도

나는 8월에 20을 경험한 것 같고
여행을 지나 지금은 +(파란색)으로 돌아온 것 같다.

▶  < 에너지 수준 20 수치심 >

수치심의 수준은 위험할 정도로 죽음과 가까운 상태로서,
더이상 살고 싶지 않지만 자살할 수도 없으니
마지못해 살아간다는 식의 자세이다.
체면을 잃었을때의 아픔이나, 모욕을 당하거나,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을때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수치심의 단계에서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다.
성폭행을 당하고 수치심으로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수치심은 신경증을 초래하고, 정서적, 심리적 건강에 파괴적으로 작용하여
열등감에 사로 잡혀 지내게 된다.
수치심에 찬 어린이들은 동물을 학대하고, 자기 들끼리도 잔인하게 굴곤한다.
수치심에 찬 사람들은 비판적이거나 피해망상적인 환상을 보기싶고,
정신병 환자가 되기도 한다.

▶  < 에너지 수준 30 죄의식 >

죄의식은 자기 연민이나 자기학대, 피해의식에서 생기는 여러 증상들이다.
자학증상이 심해질수 있다.
죄의식은 분노를 일으키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잔인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  < 에너지 수준 50 무기력 >

이 수준은 빈곤, 절망, 자포자기로 특징지어진다.
현재와 미래가 황폐해 보이고, 비애가 인생의 주제로 보인다.
이단계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단계이다.
살려는 의욕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자극에 무감각하다.
집도 없이 헤메는 노숙자들과 사회의 낙오자가 이 수준에 속한다.

▶   < 에너지 수준 75 슬픔 >

이 상태는 슬픔, 상실, 낙담의 수준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경험을 하지만 이수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되는 후회와 우울함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비탄, 공허, 과거에 대한 후회가 이 수준을 지배한다.
하나를 잃어버렸으면서도 전부를 잃어버린양 일반화시키고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사랑 자체의 상실이 된다.
이러한 감정적인 상실은 심각한 우울증이나 죽음을 불러오기도 한다.

▶   < 에너지 수준 100 두려움 >

이 수준은 좀 더 활발한 에너지의 상태이다.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건강한 반응이다.
세상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런 두려움이 인간을 활동하게 하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적에 대한 두려움,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인 다수의 두려움은 인간행동이 근본적인 동기가 된다.
두려움은 강박관념이 되어 여러가지 형태로 번져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는데 대한 두려움은 질투를 유발하고,
만성 스트레스를 초해한다. 두려움은 전염성이 있어 사회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
두려움은 개인의 성장을 제한하고 억압상태를 초래한다.

▶  < 에너지 수준 125 욕망 >

욕망의 수준에는 더 많은 에너지가 발견된다.
경제적인 욕구를 위한 욕망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광범위한 동기로서 작용한다.
금전, 명예, 권력에 대한 욕망은 ‘두려움’의 수준을
벗어난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원동력이 되어 주고 있다.
욕망은 탐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욕망이란 언제나 계속되는 에너지의 장이기 때문에 만족이란 있을수 없으며,
하나를 채우고 나면 다른 무엇인가를 또 채우고 싶어진다.
그래서 퇴계는 지나친 욕망을 줄여야만 마음의 평화를 찾을수 있다고 한다.
또한 지나친 욕망은 악의 근원이 된다고 말한다.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사람은 성취로 가는 출발선 위에 설수 있다.
욕망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뛰어 오르는 도약대가 될수 있다.

▶   < 에너지 수준 150 분노 >

분노는 좌절된 욕구에서 생기므로
그 아래 수준인 욕망의 에너지 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좌절은 지나친 욕망에서 온다.
분노는 증오로 전환되기 쉽고, 증오는 한 개인의 삶 전체를 부식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분노는 억압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사회적 부조리와 불평등은 분노를 유발하고
그것이 사회구조의 대변혁을 가져온 혁명이나 사회운동으로 발전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분노는 흔히 분개나 복수로 표현되고  따라서 폭발적이고 위험하다.
성급한 사람들, 사소한 일에 과민하고 못된 짓만 하고, 잘 싸우고,
소송을 일삼는 사람들은 이 분노의 수준에 속한다.

▶   < 에너지 수준 175 자존심 >

이 수준에 이른 사람들은 낮은 에너지 장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긍정적이다.
자존심은 삶의 행진을 계속할수 있는 버팀목 구실을 한다.
자존심은 좋은 덕목으로 평가받으며 사회적으로 권장되고 있다.
그러나 도표에 서 보는 바와 같이 자존심은 분기점인 200을 훨씬 밑도는 수준이다.
하지만 자존심의 팽만은 추락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점이다.
자존심은 방어적이고 약점 투성이다. 자존심이란 외부 조건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며
또 그것 없이는 언제나 낮은 의식 수준으로 돌아갈수 있다.
부풀어오른 자존심은 비난에 약하다.
자존심은 아주 쉽게 수치심의 수준으로 떨어질수 있으며
바로 그점 때문에 약한 의식수준이다.
자존심의 약점은 오만과 부정이다. 즉 자존심은 자만심으로 바뀔수 있다.
자존심에 가득찬 사람들은 의식의 성장을 스스로 차단한다.
자존심이 있는 한 집착에서 해방되는것은 불가능하다.
자존심에 가득찬 사람들은 자신의 성품이 갖고 있는 약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은 진실한 성장가 명예를 안겨줄수 있는
참된 내면의 힘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인 것이다.

▶   < 에너지 수준 200 용기 >

200의 수준에서는 내면의 참된 잠재력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단계야 말로 인생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구분하여 주는 분기점이다.
이단계는 탐구, 성취, 결단의 영역이다.
용기의 수준에 이르면 인생이 흥미롭고, 도전적이며, 자극적인 것이 된다.
용기는 우리에게 기꺼이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게 도와주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긍정적으로 전환시켜준다.
이수준에 이르러 우리는 비로소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기회를
효과적으로 처리할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수준에 이르면 두려움이나 결점에도 불고하고 성장할수 있으며,
걱정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노력자체를 마비시키지는 않는다.
장애물을 만난다 할지라도 잠재력을 갖기 시작한
이 수준의 사람들은 이를 자극제로서 활용한다.
이수준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써 또다른 무엇인가를 할수 있다는
긍정적인 힘을 얻고 더욱 더 용기백배하게 된다.
바로 이 수준에서 비로소 생산성이 생기기 시작한다.

▶   < 에너지 수준 250 중용 >

이 수준은 편파적인 관점으로 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편파적인 태도는 극단적인 대립을 초래하고 대립은 분열과 반대를 낳는다.
중용의 태도는 유연성과, 포용력,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파악능력을 갖게 해준다.
중용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결과를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패배하거나 좌절하거나 놀라는 일도 없게 된다.
중용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끼고,
이세상을 잘 살아갈수 있다는 자기신뢰를 잃지 않는다.
그들은 온화하고 근본적으로 정서가 안정되어 있다.
그들의 태도는 비난적이지 않다. 그들은 자유를 아주 중시한다.

▶   < 에너지 수준 310 자발성 >

자발성이란 인생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저항을 국복하고 기꺼이 참여하는 마음이다.
이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마음이 활짝 열려있다.
이수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진실로 친절하게 대하고,
사회적 경제적 성공이 저절로 따른다.
그들은 밑바닥 일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며, 사회의 선에 이바지 한다.
그들은 배움에 장벽을 두지 않는다.
이수준에 이르면 자긍심이 높고, 이것은 사회적인 인정,
존중 또는 보상 등에서 오는 반응에 의해 향상, 보강된다.
자발성이란 기꺼이 다른 사람들이 필요에 응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곤경으로부터의 회복능력, 시련을 통한 배움을 통해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수준으로 향상한다.
그들은 자존심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결점을 바라보려고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배우려고 한다.
이수준의 사람들은 성장이 빠르고 마치 향상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보인다.

▶   < 에너지 수준 350 포용 >

이 수준에 이르면 인생의 여러 외적인 힘에 대응하면서도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200이하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인생이란 폭군의 피해자로 바라보기 쉽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행복이나 문제의 근원이 “밖”에 있다고 믿는데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수준에 이르면 행복의 근원이 자신속에 존재한다고 깨달음으로써
커다란 도약이 이루어진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에게서 오거나 그들에 의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게된다.
포용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세상사를 특정한 방향으로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수준은 노자의 무위자연사상과 일맥상통한다.
포용이란 균형, 조화, 지나치지 않음을 말한다.
포용의 수준에 이르면 대립되는 의견이나 갈등에도 극단주의를 택하지 않는다.
포용의 수준에 있는 사람은 어려운 과제나 일을 만나더라도
괴로워하거나 곤혹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눈앞의 목표보다는 장기적인 목표가 항상 중요하고
자기 훈련과 일의 숙달이 무엇보다 우위에 있다.

▶   < 에너지 수준 400 이성 >

이성의 단계에서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자료들을 처리할 능력을 갖고 있어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준다.
이성의 단계에서는 관계의 미묘함, 점진적인 변화와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것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지고
추상적인 개념과 같은 상징체제에 대해서도 이해할수 있게 된다.

▶   < 에너지 수준 500 사랑 >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흔히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다.
그러한 사랑은 속절없이 무너지기 쉽고, 주어진 조건에 따라 파도치곤 한다.
사랑에 좌절하게 되면 그 동안 숨겨졌던 노여움과 의존성이 발가벗겨져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수 있는것은 상식같이 되어 있지만
이러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지독한 감상주의의 소산에 불과하다.
에너지 수준 500의 단계에서는 조건없고  변함없고
영원한 사랑에 눈뜸으로 특징지을수 있다.
사랑이란 외부의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내부에서 그 근원을 찾기에
이 수준에서의 사랑은 오르내림의 파동을 보이지 않는다.
사랑은 용서와 보살핌의 세계로 가는 길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고양시켜주고, 그 동기의 순수성으로 인해
크나큰 성취를 이루기도 한다.
사랑의 느낌을 가지면 뇌에서는 엔도르핀이 분비된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바 있다.
사랑은 신분이나 입장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가진다.
사랑이란 모든것을 감싸안고 자아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켜준다.
사랑은 삶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하여 삶을 힘차게 긍정하게 한다.
사랑은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공격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여 그것을 녹여버린다.
이수준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   < 에너지 수준 540 기쁨 >

사랑에 조건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면의 “기쁨”이 점차 차오르게 된다.
이 수준에서의 기쁨이란 사건의 변화에서 오는 갑작스런 즐거움이 아니라,
모든 활동에 동반되는 항구적인 것이다.
기쁨이란 외부의 어딘가에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매순간마다 솟구치는 것이다.
이 수준에서는 치유가 시작된다.
540 이상부터는 성인 영적 치유자, 그리고 그 제자들의 영역이다.
이 에너지장의 특징은 계속되는 역경속에서도 인내하고 ,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수준의 특징은 이들이 갖는 자비의 마음상태이다.
이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들에게는사랑과 평화를 널리 전파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

▶   < 에너지 수준 600 평화 >

이 에너지장은 초월이나 자아실현 등으로 묘사되는 경험과 깊이 관련된다.
이들은 순수한 영성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세상과 다를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세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무한한 가능성과 의미로 가득찬 진화의 춤을 계속 추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 에너지 수준 700~1000 깨달음 >

이 수준은 영적 완성자의 수준이다.
강력한 영감의 소유자로서,
이들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주는 끌개 에너지장을 형성한다.
심오한 가르침은 사람들의 정신을 앙양하고, 인간성의 자각에 눈뜨도록 부추긴다.
이러한 비전을 갖는 것은 은총이라 불리며,
이 은총에 의해 말로 표현할수 없는 무한한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육신인 나에 대한 관념이 없어져서, 운명이라는 것에도 연연해하지 않는다.
육신이란 마음의 창문을 통한 의식의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자아는 보다 큰 “진아”로 녹아 들어간다.
항상 깨어있는 상태이다.
이들은 손바닥에서 축복의 에너지가 발산되고 머리뒤에는 후광이 비친다.
이처럼 신성한 은총은 1,000에 이르는 것으로 측정되며,
역사에 기록된 인간으로서는 가장높은 수준으로서,
이들에게는 주(Lord)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나 부처의 수준이 이에 해당한다.

2015-12-19T04:23:51+09:00Sat 19 Dec 2015 4:2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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