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오랜만에 친구랑 통화를 했는데
내 목소리가 밝아졌다는 얘길 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다.
아마…성격도 조금은 밝아지지않았나 싶다.
좋은 생각하고 미래를 바라보고
나와 상관도 없는 문제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걱정하지않아도 되니까.
오랜만에 친구랑 통화를 했는데
내 목소리가 밝아졌다는 얘길 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다.
아마…성격도 조금은 밝아지지않았나 싶다.
좋은 생각하고 미래를 바라보고
나와 상관도 없는 문제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걱정하지않아도 되니까.
한번 가본적은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다시 가보려고 했다. 찍고 싶은 컷이 있어서….
박물관에 두 건물 사이를 있는 광장이 있는데
그 광장에서 오늘 공연행사가 있어서 좀 막혀있기에 사진찍기에 조금 난감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래도 어느 외국인 관광객에 계단을 올라가더니 팔을 벌리기에 그 순간을 담았다.
이래저래 안좋은 여건 내에서 잠깐 찍고 돌아왔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어쩌겠어
매그넘에서 매그넘 소속작가별로 1장씩 선정하여
6×6사이즈로 인화한 것을 100불에 판매하는 이벤트를 하고 있다.
(장수 제한 없고 기간만 제한)
https://shop.magnumphotos.com/
김중만 작가가 압구정에서 하고 있는 “아트스튜디오” 전시회도 가보았는데
김중만 작가 좋아하고 파격적인 전시회를 구상한 용기와 발상도 대단하다 생각하지만,
솔직히 거기서 1-3만원에 서명하며 파는 것보다
이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
대략 3-4장 정도 구매할 생각인데
마음에 드는 것을 몇장 찍어두었다.
예전 회사에서 허먼 밀러 에어론을 썼다.
아마 맥킨지에서도 허먼 밀러였던 것 같기도 하고.
집에서 원래 쓰던 의자도 대만제로 등받이와 좌판이 모두 메쉬였는데 아내가 허리가 아프다 하여 아내에게 주고
아내의 의자를 넘겨받았는데 아무래도 등이 불편하다.
결국 고민을 하다가
비싼 국내보다 허먼 밀러 직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새제품은 $900이 넘고
오픈 박스 제품이 $550정도라서 위험을 감수하고 오픈 박스 제품으로 구매했다.
양품이 와야할텐데….
한국은 의자가 너무 비싸다.
별 것도 아닌 것들도 30-40만원을 넘어가니…
좀 너무한다 싶다.
좋은 의자이긴 하지만
막상 또 앉으면 회사에서의 안좋은 추억이 떠오를까봐 걱정이다.
상상력이 없는 자에게는 날개도 없다.
RIP
최근 읽었던 미래 전망 중에서 가장 insightful한 내용.
서해 저편에 중국에서 지은 원자력 발전소가 그렇게 많았는지 처음 알았다.
정말 심각하게 이민을 고려해야할 시기가 오지않을까 싶다.
장 교수님의 비관적인 전망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충격적이다.
http://www.huffingtonpost.kr/zeitgeist-korea/story_b_9108486.html
***
“남은 시간은 7~8년뿐, 그 뒤엔 어떤 정책도 소용없다”
게시됨: 2016년 02월 02일 09시 50분 KST 업데이트됨: 2016년 02월 11일 17시 12분 KST
희망제작소‧허핑턴포스트코리아 공동기획
시대정신을 묻는다 ② 장덕진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장
“앞으로 숙제할 시간은 7~8년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때쯤부터 사람들이 패닉에 빠지기 시작할 겁니다. 패닉 상태가 되면 어떤 정책 수단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서울대에서 사회발전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장덕진(50) 사회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에 대해, 강하고 빠른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저출산, 고령화, 이중화, 민주주의, 환경 등 문제에 대해 이어진 설명들은 마치 종말론 영화의 장면들처럼 비관적이었다. 해학적인 표현은 있어도 낙관론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난맥상을 풀 유일한 열쇠는 “정치 바로잡는 것”에 있다고 했다. 얼핏 연관성이 적은 듯한데, 장 교수가 긴 시간을 들여 설명한 그 연결 고리는 “장기적인 문제에 손을 댈 수 있는 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시급하게 말이다.
지난 1월 15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장실에서 장 교수를 만났다. 희망제작소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허핑턴포스트코리아와 공동 진행하는 ‘시대정신을 묻는다’ 인터뷰를 위해서였다. 이원재 희망제작소장이 진행한 이 인터뷰에서 그는 “최근 4~5년 OECD 회원국의 사회 모델 비교 연구를 진행하면서 10여 개국 200여명의 사회정책 전문가를 만났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 과정에서 선명해졌다는 것이다.
물고 물리는 이중화‧고령화‧민주주의 문제
장 교수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7~8년’이라고 시간 한계를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부양율’이라는 데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부양율은 일하는 사람 100명이 일 안 하는 사람 몇 명을 부양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수치다. 현재 45 정도인데, 2050년이면 95에 이를 전망이다. 그 중 노인 부양이 75를 차지한다. 즉, 돈 버는 사람의 소득 절반 가까이를 노인 부양에 써야 하는 것이다. 장 교수는 “부양율이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바로 7~8년 후”라고 했다.
“지금은 학자들만 그래프를 보며 ‘큰일 났다’고 하지만, 그때는 보통 사람들도 느낄 겁니다. 길에 나서면 두 명 중 한 명이 노인일 테니까요. 그러면 젊은 사람들은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힘들게 일해서 절반을 노인에게 쓰느니 이민 가 버릴까?’ 하고 말입니다.”
물론 당장 사회가 무너지지는 않지만, 멀쩡한 은행도 한두 명씩 돈을 빼가다가 ‘뱅크런’에 접어들면 망하고 말듯이 한국 사회도 큰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저출산 고령화가 심각한데, 한국 사회의 위중한 문제는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이중화(dualization),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의 문제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돼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아 끄는 관계라고 했다.
“정규직‧비정규직 문제처럼 사회의 내부자(insider)와 외부자(outsider)가 갈수록 구분되는 이중화는 외부자의 출산율을 낮추기 때문에 고령화를 심화시킵니다. 고령화로 세금 낼 사람이 적어지면 이중화는 더욱 심해집니다. 이중화는 대의(representation)의 불평등을 낳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훼손합니다. 현행 민주주의는 정치적 기득권 유지를 원하기 때문에 이중화를 개선할 생각이 없습니다. 고령화된 유권자들은 현행 민주주의의 개혁에 저항하는 경향이 강하고, 역으로 현행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고령화를 이용합니다.”
이렇게 물고 물리는 관계를 끊지 않으면 사회는 악화일로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헬조선’은 정치가 이중화에 ‘불개입’ 선언한 결과
비관적 문제들은 더 있다. 통일과 환경이 그렇다. 장 교수는 “우리 사회가 워낙 물질주의 성향이 높다 보니 통일에 대해서도 ‘값싼 노동력’으로 인한 이익을 염두에 두고 얘기하는데 현 정부의 ‘통일대박’론이 그 전형적인 표현”이라고 평했다.
“서울대 통일의학센터의 연구에 따르면 북한 인구 2,500만 명 중 1,000만 명 정도가 요오드 결핍이라고 해요. 그 대표적 증상이 아이큐 100, 신장 140cm 정도에서 정체되는 것입니다. 요오드 결핍은 1년에 두 번만 미역국 먹어도 예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통일을 물질주의적 관점으로만 보는 것에 동의할 수 없지만, 설사 그 관점에 따른다 해도 ‘통일대박’이 되려면 장기적인 안목으로 북한의 인구를 관리해 가야 합니다.”
또 지금의 온실가스 배출 수준을 유지하면 2100년쯤 한반도 상당 부분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고 상기시키면서 장 교수는 “국토가 있어야 이념이고 지역이고 있는 건데 아무도 관심이 없다”고 답답해했다. 서해바다 바로 건너인 중국 동남해안에 200기 이상의 원전이 지어졌거나 건설 예정인데 그에 대한 관심도 없다면서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은 반대쪽으로 갔지만 중국 원전은 터지면 한국으로 온다”고 짚었다.
“원전 문제에서 안전을 확보하는 거의 유일한 해법은 ‘동북아 원전투명성기구’와 같은 것을 만들어 서로 감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안을 하려면 우리부터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투명성을 가져야죠. 실제는 어떻습니까? 우리 원전 투명성은 OECD 최하위권입니다.”
이렇게 심각한데도 의식하지 못 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5년짜리 정부’들이 하나같이 이런 장기적 문제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중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방치했다기보다는 ‘불개입’의 입장을 선언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장 교수는 말했다.
“대통령 담화를 들어보면 ‘동북아정세’와 ‘경제’ 얘기밖에 없습니다. 지나간 모든 대통령이 대동소이했습니다. 그 행간에는 ‘세계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이중화는 어쩔 수 없다’는 뜻이 들어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개입하지 않기로 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 의사결정입니다. 그 결과로 현재 우리는 ‘헬조선’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장 교수는 5년 단임제 하에서의 대통령과 정치인들을 ‘한 번 털고 옮겨가면 그만인 유랑 도적단’에 비유했다. 근처에 살면서 계속 훔치는 도적은 먹고 살 것이라도 남기지만 ‘유랑 도적단’은 완전히 털어가기 때문에 더 나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건 제 표현이 아니고 미국 경제학자 맨커 올슨(1932~1998)의 표현이라고 꼭 써달라”고 했다. 대통령을 ‘도적’이라 했다고 비난할 사람이 꼭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은 정치에 의해 대표되지 못한 채로 소비자, 관객이 될 수밖에 없다. 장 교수는 “앞에 말한 숙제를 못한 상태에서 우리보다 더 나가버린 사회가 일본인데, 일본 정치가 ‘극장 정치’를 잘 보여준다”고 했다. 흥행을 위한 ‘막장’ 요소만 많아진다는 것이다. 거물급 정치인 지역구에 갓 대학 졸업한 신인을 출마시키는 ‘자객 공천’이 대표적이다.
“막장 정치에 제왕적 대통령 하에서 누가 장기적 문제를 말하고 나서겠습니까? 일관된 철학과 정책활동으로 자기 브랜드를 만들려 하면 바로 견제를 받을 텐데요. 존경받는 정치인이 나오려야 나올 수 없는 구조입니다”
‘합의제 민주주의’ 강화만이 유일한 해법
인터뷰 내내 쏟아진 심각한 진단들로 패닉에 빠질 지경에 이르러서야 장 교수는 “그나마 유일하게 빠른 시일 내에 바뀔 가능성이 있는 것은”이라는 말을 꺼냈다. 이어진 말도 역시 ‘정치’다.
“출산율을 몇 년 안에 획기적으로 높이기 어렵죠. 이제 낳는다 해도 경제활동 할 때까지 20년 기다려야 하고요. 이중화는 근본적 원인이 세계화와 탈산업화에 있기 때문에 그 추세를 하루아침에 바꾸기 어렵습니다. 물론 정치를 바꾸는 것도 어렵지만, 정치란 절대 안 바뀔 것 같다가도 몇 가지 조건의 조합이 이뤄지면 하루아침에도 바뀌지 않습니까? 정치가 개입하면 나머지 문제들을 위한 노력을 이제라도 시작할 수 있게 되고요.”
한국 정치 체제의 개선 방향에 대해 장 교수는 “합의제 민주주의 요소를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합의제 민주주의는 쉽게 말하면 독일 스웨덴이 취하는 정책 결정 방식이다. 정당 간의 합의뿐 아니라 노동단체와 사용자단체, 시민단체, 싱크탱크, 이익단체 등 다양한 이해당사자들 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장 교수는 “우리는 미국식 민주주의에 익숙해져 있고, ‘국가의 발전’이라고 하면 미국과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합의제 민주주의 얘기를 하면 굉장히 어색해 한다”면서 “그러나 우리 경제 상황을 보면 미국과는 갈 길이 다르다”고 했다.
장 교수는 최근 서울대 교수 4인과 함께 펴낸 책 ‘복지정치의 두 얼굴’ 중의 한 그래프를 보여주면서 한국의 특징을 설명했다. 내수보다 수출 비중이 높고(무역의존도 높음) 불평등 정도 역시 큰(지니계수 높음) 상황을 장 교수는 “팀 내 화합이 안 돼 싸움이 잦은 축구팀이 모든 경기를 국가대항 A매치로 치러야 한다는 것”이라고 비교했다. 또는 “안전장치 없는 ‘포니’를 타고 시속 140㎞로 달리는 중”이라 할 수 있다고.
즉, 우리는 내수 시장 위주인 미국보다는 수출 비중이 높다는 점에서는 독일‧스웨덴 등과 비슷한 처지인데, 이들 나라는 ‘충분한 안전장치’를 가지고 있다. 그 장치란 ‘합의제 민주주의’다. 실제로 이중화의 폐해는 어느 나라에서나 나타나지만 합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이를 잘 제어하고 있는 곳이 독일 스웨덴과 같은 나라라고 장 교수는 전했다.
노조 대표성 높여야 ‘사회적 합의’ 가능
이중화의 폐해가 가장 크게 나타나는 노동문제를 예로 들면, 독일 스웨덴 등은 노사협상이 사업장 단위가 아니라 중앙집권적 대표 단체 단위로 이뤄지고, 그 합의가 산업 전반에 적용된다. 말하자면 ‘경총’과 ‘노총’이 맺은 합의를 전체가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산업별 노동조합이 발전하지 못했고, 노조조직률도 10% 정도로 낮기 때문에 한국노총, 민주노총이라 해도 ‘노동자 전체를 대표한다’고 인정받지 못 하는 실정이다. 실제로 지난해 노사정 합의 때도 “조직률 10% 노총이 무슨 노동자 대표냐”는 비판이 있었다. 노총들의 조직 및 운동 방식의 한계가 지적돼온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노조 대표성을 높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장 교수는 다소 파격적인 비유를 했다.
“김정은이 아무리 나쁜 지도자여도 북한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지난해 휴전선 지뢰 사건으로 빚어진 일촉즉발의 상황을 남북고위급 회담으로 넘긴 일이 있었는데, 만일 겨우 협상을 해놨더니 다른 세력이 다시 미사일 쏜다고 나오면 어떻겠습니까? 그보다는 대표성 있는 파트너가 존재하는 편이 나은 것이죠.”
노조조직률이 갑자기 높아질 수는 없을 테지만 장 교수는 노조의 대표성을 높이는 방법은 “오늘 한 얘기 중 제일 손쉽다”고 했다. 노사 대표단체 간의 합의(단체협약)가 노조원이 아닌 노동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도록 법을 만들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노조조직률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10% 수준이지만 협약 적용률은 90%가 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했다. 프랑스 국민들은 국회의원 선거 하듯이 투표해서 자신을 대표할 노총을 선택할 수 있다.
‘사회적 대타협 틀’이 정부의 최우선 과제
장 교수는 “정 노조가 싫다면 다른 방법도 있다”면서 “스웨덴은 노조가 그 역할을 하지만 독일은 정당이 하고, 네덜란드는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사회의 기둥'(social pillar)들이 그런 역할을 한다”고 했다. 형태가 어떻든 사람들이 각자도생하지 않아도 되도록, 자기를 대표하는 단체를 통해 사회적 합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단위 별로 묶어주는 조직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회적 합의, 사회적 대타협이 가능한 틀을 만드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남은 7~8년 안에, 이번 또는 다음 정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장기적인 문제에 손을 댈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틀’은 다양한 형태가 될 수 있지만, “여기서 합의한 내용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합의 후에 따르지 않는 주체는 공공의 영역에 다시는 설 수 없다”는 정도의 사회적 약속이 있어야 한다고 장 교수는 강조했다. “그런 틀을 만들 수만 있다면 그 정부 또는 정치세력은 훗날 큰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그런 틀이 생긴다고 해서 구성원들이 꼭 ‘바람직한 방향’, 즉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할 것인가의 문제다. 장기적으로는 이중화 또는 고령화를 심화시켜도 당장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장 교수는 “뭘 해야 좋을지를 알고 있는 국민이 어디 있겠느냐”면서 “한 번에 모든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만큼 바꿔서 경험해 보고, 그만큼 신뢰를 쌓은 다음에 또 바꿔보는 과정에서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노인 세대가 대체로 보수적이지만 독일의 경우는 오히려 노인들의 관용성이 높습니다. 노인이 되기 전에 성숙한 복지국가, 공고화된 민주화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노인이 되면 변화를 거부할 가능성이 높죠. 그래서 하루라도 사회적 합의를 빨리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증세 합의해서 ‘노동’과 ‘가족’에 투자해야
합의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그 밖에도 할 일이 많다. 대부분은 정치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의 중의와 통한다. 국회 권한이 강화돼야 하고, ‘승자독식’ 구조의 선거 체제도 바뀌어야 한다. 또 각 이해 단체들과 오랜 신뢰를 쌓도록 국회의원들의 전문성도 높아져야 하며, 사회적 반발이 심하긴 하지만 국회의원 수도 늘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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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변화를 통해서 ‘틀’이 갖춰진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지 물었다. “일단 증세는 꼭 필요하다”면서 “사회적 합의에 이르기 위해서는 ‘투명성’이 먼저 확보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세금은 ‘노동’과 ‘가족’에 과감하게 투자돼야 한다고.
“복지 지출은 규모보다 어디에 쓰이는지가 중요합니다. 일본처럼 연금과 의료 복지에 쓴다면 그냥 사라지는 돈일 뿐입니다. 노동과 가족에 쓰면 출산율이 올라가기 때문에 20년만 기다리면 다시 세수가 늘어납니다.”
지금 정부는 기업에 ‘노동 유연성’을 주는 데 힘을 쏟고 있지만 장 교수는 “기업의 부담이 주는 만큼 세금 부담이 늘어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면서 “어떤 식으로든 노동자가 시장 안에 머물도록 하면 많든 적든 세금을 내지만 일단 밖으로 나오면 세금으로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복지를 정치적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출산에 투자하는 돈을 아까워하면 안 되죠. ‘아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국가가 책임진다’는 큰 틀로 접근해야 출산율을 올릴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의외로 빨리 출산율 수치가 뛰어오를 가능성도 있다고. 최근 연구에 따르면 출산율의 0.3 정도가 ‘인공유산’으로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 유지가 가능한 합계 출산율이 2.1이고 현재 우리나라 출산율이 1.2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의미가 큰 수치다.
“만일 우리가 ‘이런 경우에만 아이 낳아 키워도 된다’는 식의 낡은 규범만 벗어난다면,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을 때 어떻게 키우고 학교는 어떻게 보낼지 고민할 필요 없도록 국가가 책임져 준다면 출산율이 당장 1.2에서 1.5로 뛰어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만한 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SNS로 ‘아젠다 공유’ 현상 이어질 것”
이런 변화들이 가능할까? 당면한 선거부터 시험대가 될 것이다. 장 교수는 ‘트위터’ 등 SNS를 통한 사회적 네트워크에 대해서도 연구해 왔다. 그는 “개방형 네트워크가 작동하면 정치를 떠났던 유권자들이 선거로 돌아오게 된다”면서 “그들이 정치를 떠났던 이유를 찾아 그 해법을 ‘사회적 아젠다’로 제시하고, 개방형 네트워크를 통해 확산시켜 투표율을 높이면 변화도 가능하다”고 했다.
트위터와 같은 개방형 네트워크의 영향력이 하락세라는 분석도 있지만 장 교수는 “특정 서비스는 3년을 못 가는 게 정상”이라면서도 “선거처럼 중요한 사건을 두고 사람들이 SNS를 통해서 서로 연결되고 공감대와 연대를 이뤄가는 현상은 이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들은 중 가장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두 시간여의 인터뷰를 돌아보면 비관적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럼에도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냉정한 분석이 있었고, 어쨌든 그에 맞는 해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길로 갈 수 있을지 없을지, 가더라도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지만 길이 남아 있다는 자체에 아직은 안도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게 바로 ‘희망’일 것이다.
정리 황세원(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
사진 이우기(사진작가)
나는 보았지.
그리고 나는 그러지말아야지라고 다시한번 다짐을
***
리더에게 아무도 직언을 하지 않을때 리더십은 끝이 난다.
직언이 사라지면 망함이 시작된다.
왜 조직에서 직언이 사라질까?
직언이 사라진 조직은 어떻게 될까?
직언이 사라지는 이유를 우선 살펴보자.
첫째, 리더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조직문화가 되어 있지 않다면 직언은 나오지 않는다. 직언을 한번 했는데 리더가 그 직언으로 그 직원에게 야단을 치거나 자신을 무시했다고 화를 낸다면, 또는 그 느낌을 직원이 감지를 한다면 그 다음부터 직언은 사라지게 된다.
둘째, 거의 미소를 짓지 않는 경직된 조직의 리더일수록 직언을 하는 경우가 줄어든다. 직원들은 상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때 이 이야기를 하면 우리 상사가 좋아할까 싫어할까를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러한 조직이라면 이미 그 조직은 망해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경영의 신이라 일컫는 마스시다고노스케의 자서전에 나오는 말이다. 이러한 조직일수록 솔직한 보고를 해야할 경우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상사의 얼굴이다. 상사의 얼굴이 좋지 않으면 대부분은 “다음에 보고하지 뭐”하고 미루어 버린다. 그 사이 의사결정은 늦추어지고 스피디한 결정을 하지 못해 고객은 떠나버리기 마련이다.
셋째, 리더와의 관계에서 신뢰를 잃어버린 경우라면 결코 직언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직언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기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해도 리더 좋은 일만 시킨다는 생각이 형성되면 직언을 통해 더 좋은 성과를 낼려는 노력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넷째, 그동안 직언을 통해서 효과가 없음을 느끼면 직언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 부하직원이 리더에게 직언을 한다는 것은 엄청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용기를 내어 직언한 내용들이 반영이 되지 않고 변화가 없다면 직언의 가치에 의심을 품기시작하면서 될대로 돼라는 식으로 흘러가게 내 버려 둘 것이다.
조직은 생명체와 같은 존재이다. 인간에게도 암을 비롯한 소리 없이 찾아오는 무서운 병들이 많다.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이 건강에 치명타를 가하고 있다. 조직 역시 서로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얼굴을 붉히면서 논쟁하고 양보하는 조직이라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논쟁이 사라지고 리더이 질문에 눈치를 보면서 리더가 듣기를 원하는 답변을 하기 시작한다면 이미 그 조직은 암이 급속도로 전파가 되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 조직이 망해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가름 할 수 있는 쉬운 잣대로 지난 한달 동안 직원들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직언을 했는지를 헤아려보자.
한번도 한적이 없다면 이미 직원들은 마음이 떠나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애정이 식을대로 식어버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리더에게 아무도 직언을 하지 않을때 리더십은 끝이 난다. 직언이 사라지면 망함이 시작된다”
페이스북에서 발견했다.
UC버클리에서 어느 학생이 연구한 논문인데
요약하면 행복한 사람은 social companion에,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social comparison에 민감하다는 것. 더 쉽게 풀면 행복한 사람은 타인이 제공하는 동반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타인과의 비교가 주는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는 것
정말 맞는 말이다.
***
http://greatergood.berkeley.edu/article/item/happy_people_dont_need_to_feel_superior
Happy People Don’t Need to Feel Superior
By Kira M. Newman | May 9, 2016 | 4 Comments
A new study suggests that happy people avoid the trap of social compar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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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leaders surround themselves with team members who are smarter than they are, experts say. They don’t let their ego get in the way of choosing the best people for the job.
And the same might be true of happy people, too. According to a new study published in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happy people are less influenced by social comparison—comparisons between themselves and others—when deciding who to spend time with. Like good leaders, they aren’t deterred from being around people who might seem smarter than them, and they reap the benefits of good company.
In a series of studies, researchers invited Korean undergraduates to imagine they got a mediocre score on a test. Next, they envisioned receiving a text message from a friend, who either performed better on the test and had a happy disposition, or performed worse and was generally unhappy.
Participants then reported whether they wanted to hang out with that friend, and what their mood would be after spending time with them. The happy participants—those who scored highest on their general levels of happiness—were more interested in spending time with the happy yet “superior” friend, and expected to be more chipper afterward. The unhappy participants showed no preference for either friend.
It seems like happy people aren’t troubled by seeming to do worse than friends, but could something else be going on? The researchers conducted another study to tease out the role of self-esteem, which could be the true influencer: Perhaps people high in self-esteem—who tend to be happy—don’t feel intimidated by their superiors, and that confidence is what actually protects us from unfavorable social comparison.
Yet again, even after controlling for self-esteem, the results held: Happy people were more willing to socialize with happy-but-smarter friends, while unhappy people showed no preference. The participants this time were American, extending the findings to a second culture.
Before concluding their analysis, the researchers had another possibility to eliminate, the one contained in the adage “Misery loves company.” Maybe people feeling down take comfort in hanging out with other unhappy people, who (in these studies) just happened to be the “inferior” ones.
To test that hypothesis, the researchers presented participants with a different choice: to meet up with someone who is happy but failed the test, or someone who is unhappy but aced it. When 75 young Koreans pondered that choice, the results were clear: Happy and unhappy participants alike preferred to spend time with the happy/inferior friend; misery didn’t love company.
Underlying these studies is the notion that spending time with the happy friend is the better decision—a notion that might be difficult to hear if we ourselves are the unhappy friend, but one that research nonetheless supports. Happy people, says the research, are more helpful, more generous, and more cooperative. They judge their friends more favorably, and they tend to be more sociable, attentive, friendly, and warm. Their positive mood can be infectious, triggering all its benefits in us.
For this reason, the researchers suggest that choosing to spend time around happy and high-performing companions—two traits that often go hand in hand, considering that happiness can spur success in life—is one of the ways that happy people stay happy. Of course, there’s another way of seeing the results: We can cultivate awareness of our natural bias for happy people, and deliberately make an effort to hang out with unhappy ones, which could help them over the long run. Just be sure to balance that out by spending time with some positive people!
“Happy people are hedonically wise and understand the benefits of staying connected to socially resourceful companions,” the researchers write. “They simply know better whom they should spend time with.”
역삼동 MARU180빌딩 1층에 있는 비지니스(?) 카페에
1달짜리 멤버십을 끊었다. 15만원이다.
공부를 할 것이 있어서 끊었다.
커피샵 전전하는 것보다 한군데를 꾸준하게 시간제약없이 있는게 더 좋은 것 같아서.
마루180은 아산나눔재단에서 운영하는 창업지원 공간이다
그래서 그런지 건물 자체가 전반적으로 활력이 넘쳐서
나도 같이 젊어진 것(?) 같다.
주변에서 공부/일하는 사람은 대략 10명 미만이다.
다들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열중하고 있다.
시인 김소연씨의 한겨레 기고문
한번은 곱씹어볼 내용
“어쩌면 인생 전체가 이런 시행착오로만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싶다. 죽는 날까지 경험할 필요 없는 일들만을 경험하며 살다가 인생 자체를 낭비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지라도, 커다란 후회는 안 해야겠다 생각한다. 수많은 인생 중에 시행착오뿐인 인생도 있을 테고, 하필 그게 내 인생일 뿐이었다고 여길 수 있었으면 한다. 대신, 같은 실수가 아닌 다른 실수, 같은 시행착오가 아닌 새로운 시행착오, 겪어본 적 없는 낭패감과 지루함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빛나는 경험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안 믿는다. 경험이란 것은 항상 일정 정도의 비루함과 지루함과 비범함과 지극함을 골고루 함유한다. 돌이킬 수 없는 극악한 경험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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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의 볼록렌즈] 경험
등록 :2016-06-06 19:16
어떤 제안을 받았다. 재미있을 것도 같아서 승낙을 했다. 큰 기대를 했거나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다고 기대하던 일은 아니었다.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고 안 해본 경험이라 조금쯤 호기심도 있었다. 그 일을 그리하여 하게 됐고,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다. 지루했고 시간만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누군가에게 일러두듯 생각을 해두었다. 누군가에게 일러두듯 생각해두지 않으면 명심하지 못할 게 뻔하다. 겪고 나서야 거절할 일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채는 나 자신이 못마땅했는데, 이제는 경험하지 않고서는 미리 헤아리지 못하는 게 나의 특징이려니 한다. 두 번씩 반복하는 일만 없길 바란다. 어쩌면 인생 전체가 이런 시행착오로만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싶다. 죽는 날까지 경험할 필요 없는 일들만을 경험하며 살다가 인생 자체를 낭비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지라도, 커다란 후회는 안 해야겠다 생각한다. 수많은 인생 중에 시행착오뿐인 인생도 있을 테고, 하필 그게 내 인생일 뿐이었다고 여길 수 있었으면 한다. 대신, 같은 실수가 아닌 다른 실수, 같은 시행착오가 아닌 새로운 시행착오, 겪어본 적 없는 낭패감과 지루함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빛나는 경험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안 믿는다. 경험이란 것은 항상 일정 정도의 비루함과 지루함과 비범함과 지극함을 골고루 함유한다. 돌이킬 수 없는 극악한 경험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김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