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적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이 삶의 기준 또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예전에 깨닫고
과감하게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결정은 후회하지 않는데…하지만
long (and tough) way to go.
전날 너무 일찍 잠들어서일까? 새벽 4시에 잠에서 깼다. 이미 7시간 이상을 잤다.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을 뒤척이다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덕분에 해 뜨기 전에 출근길에 나섰다. 출근 버스 밖을 보니 고속도로가 차들로 벌써부터 붐볐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차들이 이렇게 많다니, 한국 사람들 참 열심히 산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긴 미국 유명 경영저널 패스트 컴퍼니가 `일 중독 세계 넘버 원`으로 꼽은 나라가 한국이다. 문득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결국은 `행복`이 최종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사는 사람 중에도 불행한 사람 많다. 마치 불행해지기 위해 열심히 산 것처럼 말이다.
열심히 사는데 행복과 멀어지는 건 재능이 없어서도, 머리가 나빠서도 아니다. 똑똑하며 성취동기가 높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불행한 사람 많다. 이들은 행복을 위한 여러 요건을 두루 갖춘 거 같은데 왜 불행한 걸까? `파괴적 혁신` 개념을 내놓아 유명해진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자기 삶의 목적(purpose)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고 한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은 5년마다 졸업생들을 초청해 동창회(reunion)를 연다. 크리스텐슨 교수 역시 이 학교 출신이다. 5년마다 동창회에 참석해 옛 급우들을 만난다.
학교를 졸업하고 첫 5년이 흐른 뒤에 만난 친구들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내 급우들은 엄청나게 잘 나가는 것 같았다. 엄청난 직장을 구했고, 일부는 이국적인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그들 자신보다 훨씬 외모가 뛰어난 배우자를 만났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환상적인 삶을 살 운명 같아 보였다.”(크리슨텐슨 교수의 책 `how will you measure your life?`에서)
하지만 다시 5년이 지나자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옛 급우들 중 상당수는 불행해 했다. “(동창회에서는) 이혼과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넘쳤다. 한 급우는 몇 년째 자식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했다. 한 친구는 (대학원) 졸업 후에 벌써 세 번째 결혼이라고 했다.” 이는 단지 삶의 일시적인 위기가 아니었다. 매 5년, 동창회가 열릴 때마다 불행한 삶을 사는 동창생의 수는 늘어갔다.
이들은 게을러서 불행해진 게 아니었다. 열심히 일했고 상당수는 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친구들 중에는 맥킨지 같은 유명한 컨설팅 회사나 골드만 삭스 같은 금융회사의 중역도 나왔다. 다른 친구들도 포춘 500대 기업의 최고 자리로 순항하고 있었다. 일부는 이미 성공적인 창업가가 됐다. 몇몇은 일생을 바꿀 만큼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삶은 그들을 배신하고 있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기고한 글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진단했다. “시간과, 재능, 에너지를 어떻게 쓸까 결정할 때, 삶의 목적을 맨 앞과 중심에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간과 재능 등은 제한된 자원이다. 일과 가족, 놀이 등 삶의 다양한 활동에 어떻게 배분할지 선택해야 한다. 그때 나침반이 되는 기준은 바로 `자기 삶의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크리스텐슨 교수의 동문들은 `삶의 목적`이 이 없었다. 그 결과,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행복과 무관한 곳에 썼다. 뛰어난 재능으로 열심히 일했으나 삶은 점점 불행해졌다.
우리 삶의 목적이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 시간과 에너지를 배분하게 될까? 지나온 내 삶을 돌이켜볼 때, 그건 바로 `타인의 인정`이다.
목적 없는 삶에 타인의 인정은 우리 자존감의 원천이 된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싶어 한다. 타인이 우리를 인정해줄 때, 우리는 `내가 가치 있는 존재`라며 자존감을 느낀다. 소중한 자아를 지킬 수 있다. 게다가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무리 지어 살아야 한다. 타인의 인정은 무리 즉, 공동체에 소속돼 있다는 느낌을 준다. 외로움을 없앤다. 그래서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낀다.
직장은 현대인이 그 같은 인정을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다. 노력하면 성과가 눈에 보인다. 급여와 승진이라는 보상도 얻는다. 많은 돈과 높은 자리는 `타인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증표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졸업생처럼 똑똑하고 성취동기가 강한 사람일수록 그 같은 인정을 쉽게 얻어낸다. 그들은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사람들 아니던가? 게다가 조직은 그들의 귀에 끊임없이 속삭인다. `승진이나 보너스에서 남들보다 뒤처지면 당신은 불행해질 것이다. 자존감이 파괴될 거다. 반대로 남들보다 앞서서 높은 자리를 얻고 돈을 벌면 당신은 행복해질 것이다. 그 같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 실제로 큰 돈을 벌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면 쾌감을 느끼긴 한다. 하지만 그 쾌감은 일시적이다. 사람들은 다시 그 쾌감을 얻기 위해 일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러나 그들은 일 못지않게 삶의 큰 기둥을 이루는 `사랑`에는 자원을 배분하지 않는 실수를 저지른다. 사랑을 통해 `타인의 인정`을 받기란 매우 어렵다. 육아를 예로 들어보자. 육아는 단기에 성과가 나오는 게 아니다. 10년, 20년이 지나야 성과를 알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미래 성과는 불확실하기만 하다. 게다가 아이는 부모에게 종종 불만을 드러낼 뿐, 여간해선 감사해하지 않는다. 육아는 그 자체에서 의미와 기쁨을 찾을 수 있을 뿐, 누구의 인정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국 재능 있고, 성취동기가 강한 사람일수록 일에 과도한 자원을 할당하게 된다. 사랑과 가족이라는 삶의 또 다른 축에는 소홀하게 된다. 가족과 멀어진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더 일에 몰입하게 된다. 일을 통해 가족과 갈등을 잊으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뻔하다. 크리스텐슨 교수의 친구들이 그랬듯이, 아내와 불화하고 이혼하거나, 자식과 연결이 끊어진다. 겉으로는 화려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내면은 망가진다.
그러니 직장에서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다면, 때때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남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만약 아직까지 삶의 목적을 찾지 못했다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 삶의 목적 없이 그저 열심히 사는 건 불행해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꼴이 될 수 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돼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하루 1시간씩을 투자했다고 했다. “나는 신이 왜 나를 이 세상에 보냈는지 그 이유에 관해 읽고 생각하고 기도하는데 매일 1시간씩을 쓰기로 결심했다. 매우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었다. (중략) 결국 나는 내 삶의 목적을 찾아냈다.” 우리 스스로 내 삶의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과 일치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삶의 의미를 느끼고 자신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다. 그 삶을 돌아보며, 우리는 미소 지을 수 있다.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타인의 삶이 아니라 내 삶을 살며, 공동체에 기여하며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김인수 오피니언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