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교수 인터뷰
대안은 없고
비판만 하고
그정도는 나도 하겠다.
**
장하준 교수 인터뷰 “증세는 내 돈 뜯는 것, 복지는 사치… 이런 시각이 논의 걸림돌”
이인숙 기자 sook97@kyunghyang.com
입력 : 2015-02-15 21:57:46ㅣ수정 : 2015-02-15 22:01:31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52·사진)가 한국의 ‘증세 없는 복지’ 논쟁에 대해 “증세는 내 돈을 뜯어가는 나쁜 것, 복지는 사치와 낭비라고 보는 격”이라며 “ ‘돈이 없으니 사치를 늘릴 수 없고, 세금은 나쁜 것이어서 걷을 수 없다’고 하는 이상 어떤 논의도 진행될 수 없다”고 말했다. 세금과 복지의 기본개념과 담론구조가 잘못돼 있어 생산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못하는 한국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우리는 이미 고복지 스타트 단계”라고 한 것에 대해 “아이가 막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키가 크고 있으니 곧 어른만큼 잘 자랄 거니까 밥도 안 주고 놔둬도 된다는 얘기나 똑같다”고 비판했다.
장 교수는 지난 11일 경향신문 서의동 경제부장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세금과 복지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함께 사는 ‘공동구매’에 비유해 설명했다. 세금을 거둬 집을 짓고 길을 만들고 병원을 세워 같이 쓰면 사회적 비용이 더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현재 한국 경제가 이렇게 침체된 것은 1970~1980년대에 만들어진 주력산업의 수준을 높이거나 새로운 산업분야를 개척하는 것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박근혜 정부는) 부동산 경기부양 등 쉬운 길만 찾고 있다”고 비판했다. 장 교수는 “산업정책 전문가인 내가 자꾸 복지 얘기를 하는 것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연말정산을 계기로 불거진 ‘증세’ 논란이 ‘증세 없는 복지’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철학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한국의 증세 관련 논의 흐름을 어떻게 보나.
“세금과 복지에 대한 기본 개념이 모두 잘못됐다. 세금은 ‘(내 돈을) 뜯어가는 것’ 혹은 정부가 돈을 거둬서 태워버리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세금은 우리 집이고 학교이고 병원이다. 도서대여점에서 돈 내고 책을 빌려보는 대신 큰 도서관을 만들어서 책을 공짜로 빌려보면 오히려 더 싸게 책을 나눠볼 수 있는 거 아닌가. 한국에선 복지도 ‘사치’나 ‘낭비’ 혹은 가난한 사람들의 의존성을 키우는 ‘독소’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돈 있는 사람에게 돈을 뜯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식의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 다같이 돈을 내서 의료나 교육을 공동구매하는 ‘보편적 복지’라면 복지는 사치가 아니라 필수품이다. 한국은 복지가 잘 안돼 있다 보니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월등한 1위다. 사회가 각박하고 기댈 데가 없으니 젊은이들이 의대, 법대 등 안정된 직장이 보장되는 길만 찾는다.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한 것도 복지미비 때문이다.”
– 최경환 장관이 “우리는 이미 고복지 스타트 단계여서 새로운 복지를 만드는 건 맞지 않다”고 했다.
“아이가 막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키가 크고 있는데 이 아이는 곧 어른만큼 잘 자랄 거니까 밥도 안 주고 놔둬도 된다는 얘기나 똑같다. 복지라는 게 나무 자라듯 그냥 자라지 않는다. 정부가 제도를 잘 설계하고 재원도 확충해야 클 수 있다. 대가족이 해체되면서 가족이 해결해주던 것을 나라에서 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됐다. 고령화도 진전돼서 구조적으로 그런 (복지가 늘어나는) 요인이 있는 건 맞다. 하지만 미흡한 수준이라도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틀을 잡아놨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지 자동으로 된 것이 아니다. 복지가 늘어나는 추세가 시작됐으니 가만히 있으면 늘어나게 돼 있다는 건 말이 좀 안되는 얘기인 것 같다.”
– 법인세 논란을 보면 한국의 정부관료와 정치인들이 지나치게 ‘친기업’ 정서를 갖고 있는 듯 보인다. 한국사회의 전반적 분위기가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체인 기업에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에 젖어 있는 듯하다.
“사실관계도 잘못 알고 있는 게 많다. 미국 정부가 복지에 쓰는 돈은 GDP의 20% 정도이지만 개인 지출까지 포함하면 결국 유럽 수준이나 마찬가지다. 미국은 의료가 공공복지로 거의 해결되지 않아 사적으로 의료비를 많이 지출한다. 사적지출을 합치면 미국은 의료비에 GDP의 17%를 쓴다. 10% 안팎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오히려 많다. (무상의료인) 영국처럼 정부가 직접 약을 사면서 고혈압약 2000만명어치 달라고 하면 얼마나 많이 깎을 수 있겠는가. 미국은 개인별로 하다보니 깎지도 못한다. 의료비에 유럽보다 2배나 많은 돈을 쓰면서도 낭비가 많고 건강지표가 선진국 중 꼴찌다. 그리고 세금 안 내고 규제 안 하는 게 결코 친기업은 아니다. 왜 모든 기업이 법인세 10%만 내는 파라과이 같은 나라로 가지 않느냐면 제공하는 서비스가 형편없기 때문이다. 독일은 법인세가 30%여도 기업들이 투자하는 건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서다.”
– 증세에 대한 저항이 심한 것은 내가 낸 세금으로 긍정적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래서 한국 내 일각에선 복지목적세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있다.
“ ‘복지를 해보니 이렇게 좋더라’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맞다. 대표적 복지선진국인 덴마크는 세금 부담이 GDP의 50%가 넘지만 일부 설문조사를 보면 88%가 불만이 없다고 한다. 목적세는 정치적 저항을 줄이는 데 유용할 수 있으니 용도가 명확한 부분은 초기에 목적세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세금을 다 목적세로 할 경우 재정 유연성이 떨어질 수 있다.”
– 한국 경제가 본격적인 저성장 시대에 진입했다는 신호가 나오고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보다 더 심각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휴대전화를 빼면 한국의 주력산업은 모두 1970~198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새로운 산업을 거의 개척하지 못했다. 기계, 부품, 소재 같은 산업이 중요한데 아직 취약하다. 한국의 무역은 대부분의 나라와의 교역에서 흑자를 내고 일본에 엄청난 적자를 내는 구조인데 그게 다 기계, 부품, 소재 분야다. 첨단산업에서도 휴대전화와 반도체 말고 새로 뚫은 분야가 없다. 1990년대부터 산업정책을 등한시하고 의료관광, 금융허브 등으로 안이하게 경제를 키우려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우리는 산업경쟁력 자체가 약화되고 있어 금융거품이 빠지거나 외부 충격이 오면 일본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 성장동력을 찾으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경제를 개방하면 기업이 살아남으려 경쟁하면서 발전할 거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바보 같은 짓을 이미 많이 해놨다. 미국,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당장은 농산물이 타격을 받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가장 피해를 보는 건 아직 생겨나지 않았지만 그런 나라와 경쟁해야 하는 첨단산업들이다. 지금 구조조정에 들어가는 조선산업의 모습이 향후 대부분 산업의 미래일 것이다. 하지만 옛날처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 잡아다가 콧수염 잡아당기며 산업정책을 펴던 시대는 지났다. 민주적 채널을 통해 기업, 노동계, 기술 전문가들이 모두 모여 산업정책과 복지를 논의해야 한다.”
– 정부는 내수를 진작시킨다며 부동산 규제 완화로만 문제를 풀려고 한다.
“쉬운 길만 찾는 것이다.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가 침체 국면이고 우리 경제의 체질이 약해져서 일어나는 현상이니 한두 가지 방책을 써서는 살아날 수 없다. 국가적으로 산업을 업그레이드하고 신산업을 키우는 일을 했어야 하는데 그걸 안 했으니 지금 큰일이다.”
– 정부의 4대 구조개혁 중 핵심은 노동시장을 유연화해 정규직 해고를 쉽게 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이 되더라도 재기할 수 있는 복지시스템을 만든 뒤 유연화하는 게 순서 아닌가.
“맞다. 유럽의 핀란드, 네덜란드 같은 국가도 비정규직 비율이 높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의료, 교육 등 복지가 잘돼 있어서 비정규직이 됐다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지는 않는다. 복지 없이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면 사회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다.”
– 복지 강화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보나.
“떨어지면 도저히 재기할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드니 직업선택도 보수화되고 남에게 관대해질 수 없는 사회가 돼가는 것이다. 삐끗하면 나도 죽게 생겼는데, 대가족 제도가 해체돼서 주변에서 도와줄 사람도 없다. 사실 나는 복지문제 전문가가 아니다. 산업정책 전문가다. 그런데도 자꾸 복지 얘기를 하는 것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장하준 교수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경제발전에서 경제사와 사회정치학적 요소들을 중시하는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을 구체화하며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뮈르달상(2003년), 경제학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에프상(2005년)을 최연소로 수상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0년 한국인 최초로 동 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비롯해 <사다리 걷어차기> <국가의 역할> 등의 저서가 36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