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사표

직장생활과 관련하여 동감하는 내용이 많다.

나는 매일 사표를 쓴다, 빨리 탈출하고 싶어서

ㆍ직장인 3명 가상사표… 상식보다 요령이 통하는 ‘신의 직장’도, 실적으로 인간 통제하는 ‘기업’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매일 널 꿈꾸고 매일 널 외면해.’ 한 시인은 ‘퇴사’를 두고 이렇게 읊었다. 상사에게 사직서를 던지고 떠나는 장면을 안 그려본 직장인이 있을까.
 
월급과의 애증관계, 상사와는 밀고 당기기. 지친 직장인들에게 사표는 매일 꾸고 깨는 꿈이다.
 
가상으로라도 사직서를 쓸 수 있다면? 정년 앞둔 부장님부터 사회 초년생 신입사원까지 직장인 3명이 꾹 눌러 담았던 일터 이야기를 털어놓은 가상 사표를 던졌다. 우리에게 회사는 무엇이며, 직장을 떠난 삶은 어떤 모습일까. ‘일신상의 이유’라는 짤막한 핑계 대신 긴 이야기를 담아 대신 가상사표를 썼다.

꿈을 가지고 직장에 들어오지만 막상 직장생활과 현실이 너무 달라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가상의 사직서를 써보면서 자신의 직장생활을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사진은 사직서를 쓰는 모습을 연출해 찍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20대 후반 ‘신의 직장’ 2년차 신입사원 ㄱ씨

▲ 회사가 가르치는 ‘사회생활’이란 일 키우지 않기, 모르는 척 책임지지 않기였다. 꿈? 자아실현? 이제 그런 게 다 뭔가 싶다.

지인들은 우리 회사를 신의 직장이라고 불렀어요. 부장부터 사원까지 밥먹듯이 지각하고 사무실에 붙어 있질 않아도 나무라지 않는 회사. 철밥통에 업무 성과와 상관없이 일을 안 해도 승진할 기회가 널렸거든요. 그저 내가 융통성 없는 거겠지, 2년간 자책하며 버텼습니다. 떠나는 마당에 남 탓 좀 실컷 하고 가렵니다.

‘초심’. 제가 제일 싫어하게 된 말입니다. 회사와 사회가 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데, 왜 나한테만 그놈의 초심 타령을 해대는지. 2년 전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망하던 일을 하게 됐고 저도 회사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습니다.

입사하고 3개월간 일주일에 ‘8일’은 술을 먹고 4일은 토하며 무슨 정신으로 회사를 다녔는지 모르겠어요. “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 “이것도 능력인데”라고 선배들이 그랬죠. 선배 실망시키기 싫어서 억지로 술 마시고 토하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던 게 몇 날인지.

술 먹는 건 정말 능력이 맞더라고요. 부장에 관해 들리는 이야기는 업무 성과나 리더십 대신 폭탄주 제조 능력에 관한 것뿐이었어요. 지금 부서 관련 경력이 전무한 부장이 술 잘 먹고 아부 잘해서 승진한 회사니까요. 술 냄새 풍기며 아침 10시에 출근해 3시간 동안 점심 먹고 오후 4~5시면 정체 모를 외근 나가는 게 부장의 일과였습니다.

퇴근하는 부장의 발걸음은 항상 가볍고 당당해 보였습니다. 사무실에서 부장 보기가 어려워 저는 닷새 동안 서류 하나 결재를 받지 못한 적도 있어요. 부장의 간부회의용 보고서도, 인원과 금액을 부풀린 부장의 가짜 업무추진비 사용내역도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줄 잘 선 부장을 지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부장 따라 부서 선배들도 곧 변하더군요. 사무실 자리조차 지키지 않는 선배들의 공백을 제가 메우는 게 어느 순간 너무도 당연해졌죠. 정시에 출근해 점심시간 지키고, 곧잘 야근하는 제게 돌아오는 핀잔이 잦아졌습니다.

“너 왜 혼자 9시부터 나와 있나.” “부장님 산책하시는데 같이 가드리지 그랬냐”. 자기 일을 내게 미룬 선배들은 고마워하기보다 불편해했어요. 저는 어느새 별난 원칙주의자에, 융통성 없이 남의 일을 떠맡아 하는 막내가 돼 있었습니다.

어찌됐건 회사에서 인정은 받았습니다. 하지만 부서 밖으로 눈을 돌려도 비전을 보여주는 사람이 없어 답답했어요. 어떻게 하루, 일주일을 무탈하게 지낼까 자기 보신에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간부라고 앉아서 한 치 앞만 보고 있습니다.

회사가 가르치는 ‘사회생활’이란 이랬어요. 적극적으로 나서 일 키우지 않기, 방향이 틀어지면 모르는 척 책임지지 않기. 잘못을 사과하는 건 부서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고, 고맙다고 하면 ‘을’을 자처하는 나약한 인간이라고 하더군요. 부서 간 기싸움에 결재가 미뤄져 협력업체는 피가 말라도 그런 사정에는 눈감아야 자존심이 세워지는 거더라고요. 투철한 책임감은 남을 불편하게 하는 거였고, 정직함은 융통성 없음과 동의어였습니다. 그런 줄 진작 알았으면 돈 많은 남자 물어서 결혼할 생각이나 했지, 피 터지게 공부는 왜 하고 꿈은 왜 꿨을까요?

송곳이라는 웹툰에서 이런 대사를 봤습니다.‘강제된 선택지에 시시한 통찰을 덧칠해서 마치 새로운 답인양 떠들어대는 어른인 척하는 어른들의 하나마나한 조언들.’ 더 이상 시시한 조언들에 기대 버티고 싶지 않아 신의 직장을 떠납니다. 도망치는 거예요. 꿈? 자아실현? 이제 그런 게 다 뭔가 싶어요. 그저 내가 뛴 만큼 벌어서 쓸 수 있는 나만의 일이라면, 상식이 통하는 사람들과 일할 수 있다면 뭐라도 좋아요.

■ 40대 초반 대기업 협력업체 팀장 ㄴ씨

▲ 실적이 업무 평가에 포함되는 순간부터 동료들은 등돌리고 싸우고 줄줄이 그만뒀다. 괴로워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닌 지 오래다.

제게 회사 동료들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친구들이었습니다. 제가 시골 살다가 사춘기 때 도시로 이사왔거든요. 애들이 촌놈이라고 놀리는 게 싫어서 싸움질하고 다녔어요. 사고를 크게 쳐서 고등학교 졸업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다 스무 살 넘고 마음 잡고 들어간 첫 직장에서 18년째 일해왔습니다. 여행도 다니고, 일 끝나면 술 한잔하고, 휴일에 축구하고…. 다 회사 동료들하고 했어요. 고객들이 겪는 제품 고장을 해결해주고 ‘잘한다’, ‘기술 좋다’ 얘기 들으면 흐뭇했습니다.

이 모든 게 황폐화되는 건 한순간이더군요. 우리는 기술 문제를 해결하는 기사들인데, 5년 전부터 영업 실적이 업무 평가에 포함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승진해서 팀장이 됐습니다. 상품을 못 파는 직원들 퇴근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제가 이행했어요. 9시 넘어서까지 동료들을 사무실에 붙잡아 놓고 반성문, 영업계획서 쓰게 하는 거예요. 직원들 본인 명의로 상품에 가입하게 강제 할당도 했습니다. 몰래 빨리 퇴근시키기도 하고, 평가를 낮게 받은 직원은 전산 조작해주기도 했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었어요.

누군가 ‘배째라’고 퇴근하면, 위에선 ‘내일부터 나오지 마’ 소리가 나옵니다. 동료가 잘려도 눈치 보느라 항의를 못했습니다. 대화는 줄고 싸움이 늘었습니다. 10년 넘게 지낸 동료들이 줄줄이 회사를 그만두고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닌 지 오랩니다. 동료들의 삶을 제가 통제하고 있다는 게, 사람으로서 못할 짓이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습게 팀장 감투 썼다고, 밖에서 사람들 만나면 으스대는 나쁜 버릇도 들었습니다.

우리 회사는 대기업 자회사의 사업부 협력업체입니다. 1990년대 후반 처음 입사할 때 저는 자회사 정직원이었습니다. 사장은 항상 본사나 자회사에서 내려옵니다. 사장이 바뀔 때마다 제가 계약하는 법인도 계속 바뀐 건 은행에서 알았습니다. 대출 끼고 작은 집이라도 사러 갔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습니다. 한 직장에서 쭉 일해온 저한테 “회사를 너무 자주 옮겨서 신용도가 낮다”고 하더군요. 지금 제 법적인 근속 기간은 4개월입니다. 회사에서 보낸 18년의 무게도 그만큼 줄어든 것 같습니다.

이제 회사 안에서 더 목표가 없습니다. 전에는 승진하고, 월급 오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5년 전 본사 통제가 심해지면서 저는 팀장 되고도 임금이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5년 전과 똑같이 연봉 3000만원이 안돼요. 임금은 본사가 임명한 사장이 얼마를 챙겨가기로 마음먹느냐에 달렸습니다. 임금이 줄고 붓던 적금 금액을 맞출 수가 없어서 저축도 그만뒀어요. 어, 어, 어 하는 사이 내 삶이 없어져버린 느낌입니다.

여행 가고 차도 사고 연애하면서 평범하게 사는 일상을 잃었습니다. 팀장이라고 남들보다 1시간 일찍 나오고 가장 늦게 퇴근하고, 한 달에 한 번 쉬었습니다. 여자 만날 시간이 어디 있나요? 때 되면 장가가고 애 낳고 살 줄 알았는데 이젠 포기했습니다.

요새 고향에서 농사짓고 마음 편히 사는 친구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직하면 고향 산속에 들어가 집 짓고 살 생각입니다. 이제 탈출하고 싶습니다. 산에서 약초랑 나물 뜯어다 팔까 합니다. 요새도 가끔 산나물 캔 걸 무쳐서 직원들 주면 다들 맛있다고 하는데 그게 참 좋더라고요. 근근이 살더라도 지금보다 행복할 것 같습니다.

■ 50대 초반 한 금융기업 부장 ㄷ씨

▲ 승진하고 연봉 오를수록 “실적 좋을 겁니다”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저녁이 없는 삶은 괴로웠고 가족도 힘겨워했다.

승진하고 연봉이 오르고 한가해질수록 회사 생활이 괴로웠습니다. 제 일이라는 게 종일 앉아서 오늘 얼마를 벌 수 있는지, 벌었는지 따지고 지켜보는 겁니다. 모든 게 돈과 숫자입니다. “이번달에는 실적이 더 좋을 겁니다.” “목표치를 달성할 수 있을 겁니다.” 입에 거짓말을 달고 살았습니다. 회사에서 멍하니 앉아 있을 때도 많지만,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책임질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욕을 먹고 사과하는 요식행위를 하라고 억대 연봉을 주나보다 싶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잇기 위해 내 시간을 파는 기분이었습니다.

동기들 사이에서도 몇 년 전부터 승진을 두고 경쟁해 마음 편히 못 만납니다. 끝없이 날아오는 낙하산 앞에서는 다 천민일 뿐인데요. 젊을 땐 주요 기업 간부나 고위 공직자 같은 이들은 적어도 적정 수준의 교양과 능력이 있어서 그 자리에 갔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지금은 어디 회장이다, 중책을 맡은 사람이다 하면 룸살롱에서 많이 기었겠구나, 제대로 훈련받은 사람은 결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렇게 성공한 뒤에 소고기 먹는 거 말고 뭐가 더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은 소고기 먹으려고 기써서 공부하고 경쟁해 온 건가 싶습니다.

아침마다 양복 입고 여의도로 출근하는 삶이 자랑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이곳에는 내로라하는 회사들이 몰려 있고 여러모로 수준 높은 동네라고 생각합니다. 그 좋은 회사들 앞에서 노조 조끼 입고 시위하는 이들의 모습을 매일 봅니다. 우리 회사에도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이 있지만 우리가 적인지 동료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처음 입사했던 1990년대에는 식당 노동자들까지 모두 한식구라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웬만큼 못나도 함께 가자는 생각, 신입사원 시절에는 그런 온정주의가 조직을 병들게 한다고 여겼는데 성과주의가 전부인 지금은 그때가 그립습니다.

저도 한때 일에 열정을 다 바쳤습니다. 입사하고 수년간은 자진해서 새벽까지 회사에 남았습니다. 대학에서 배운 걸 실제 업무에 여러 가지로 적용해보는 게 즐거웠습니다. 매달 돈까지 주니 환상적이었죠. 거기다 회사에서 맛있는 밥 사주고 술 사주니 나도 성공한 인생이구나 싶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일한 사람과 그 성과를 가져가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 일의 내용보다 어떻게 포장해서 위에 보고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는 건 나중에 배웠습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재미있는 일과 멀어졌습니다.

10년 전쯤엔 일부러 새 프로젝트에 자원해 1년간 신나게 일했습니다. 매일 야근하고 집에 가자마자 쓰러져 자는 게 일상이던 어느 날, 새벽 2시쯤 잠이 깼는데 아내가 혼자 식탁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더군요. ‘힘들다’고 했습니다. 아이들, 집사람과 함께인 삶이니까 이대로는 안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이후 다시 관리자의 삶을 택했고, 술자리에 다니며 줄 서고 사내 정치에 시간 쓰기를 포기한 대신 가족과 저녁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손해 보거나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회사를 나와서는 뭘 하든 두 아이, 아내와 함께 해나가려고 합니다. 퇴직하고 나면 우리 가족 브랜드를 만들어 경영해보자는 이야기를 종종 나눕니다. 애들은 요리에 관심 있고, 만화와 소설이 좋다니 출판업도 좋습니다. 제 아이들은 저처럼 좋아하는 일이 아닌 데 시간 쓰면서 살지 않길 바랍니다. 저는 교육과 관련한 공부를 해보고 싶습니다. 대도시가 아닌 곳으로 삶터를 옮기는 것도 고민 중입니다.

저보다 젊은 한 거래처 간부가 얼마 전 갑자기 쓰러져서 수술을 받게 됐습니다. 저도 쉰이 넘었습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왜 이런 일에 시간을 쓰고 있나 싶습니다. 20년 넘게 다닌 회사를 그만두면 아쉽고 그리워질 것들에 대해 자문해봤습니다. 즉각 아무것도 없다, 빨리 나오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회사에 아무런 원망도, 남기고 싶은 말도 없습니다.

<김여란 기자 peel@kyunghyang.com>